안자묘는 처음에 순흥안씨 종가가 있던 개성에서 모셔지다가 종가가 옮겨진 파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부조지전이 재개 된 서울 도동(남산아래)과 황해도연백을 거쳐 지금의 의왕시 월암동 425번지에 안자묘를 중건하였다.

1) 개성(開城)
충렬왕 32년(1306) 음(陰) 9월 12일 문성공이 향년 64세로 서거하자 장지(葬地)는 38선 이북 장단군(長湍郡) 대덕산(大德山) 자자원(子坐原)에 안장하였다.
하지만 문성공은 개성(開城)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문성공 사후 사당(祠堂)도 개성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후손 안낙진(安洛鎭)이 쓴 「서정일기(西征日記)」에 개성[松城] 양온동(良醞洞) 문성공의 옛 집터가 있던 곳에서 여항비(閭巷碑)를 보고 참배한 일화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문성공이 개성에 거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문성공의 고택이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 문경공(文敬公) 한수(韓脩),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고택과 더불어 개성 양온동(良醞洞)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2) 파주(坡州)
문성공의 사우는 개성에서 모셔진 이후 종가의 이동에 따라 함께 이동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전기 순흥안씨 종가가 파주에 있었다는 것을 1525년에 쓰여진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 권 3의 내용 중 성현의 외가 쪽 선조인 문성공(文成公)에 대한 언급과 순흥안씨 일가가 파주를 개척하여 밭이 수만 경이요, 노비가 백여 호에 이르며 번창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글을 통해 문성공의 손자 목(牧)이 파주에 정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안목은 문성공의 종손이므로 문성공의 사우도 파주에 모셨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 개성에서 서울 지금의 회현동과 필동 남산 인근 훈도방(薰陶坊) 주자동(鑄字洞)으로 종택을 옮겨 회헌선조의 영정과 경질공의 신주를 모셨다. 이 종택은 1650년 경까지 건재하였다. 이 사실은 선조 때 재상 권희(權僖)가 쓴 『주자동지(鑄字洞志)』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3) 남산 도동(桃洞)
남산 도동의 사우에 관한 기록은 이전에 모셔오던 사우가 사라짐에 절손을 안타까워하며 사손을 세우고 사판을 만들도록 하는, 영조 41년(1765)의 어명과 종친들이 종회를 통해 의견을 모아 서울 도동에 사우를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상량문에 기록된 것을 통해, 도동(桃洞)에 문성공의 사우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순흥안씨사효록(順興安氏思孝錄)』에 실린 『회헌실기』의 연보에는 영조대(英祖代)에 왕의 명으로 사손(嗣孫)을 세워 도동(桃洞)에 사당을 세우게 하여 받들도록 한 기록이 나와 있다. 또 김근순(金近淳)이 쓴 『도동(桃洞) 사우(祠宇) 상량문』의 내용을 통해 도동에 사우가 건립 된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위의 글을 통해 가문이 쇠락하여 오랫동안 사판을 모시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여 종회의 결정으로 도동(桃洞 지금의 서울역 인근 남산 아래)에 사우를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4) 황해도 연백(黃海道 延白)
안자묘를 도동(桃洞)에 입묘(立廟)하여 모시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종가가 황해도(黃海道) 연백군(延白郡) 백천(白川) 송성(松城)으로 이주하게 되었고,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松川里)의 진산(鎭山) 남록(南麓)의 부지 만여 평에 수백 평의 사우 및 강당 기타 부속 건물 등 거대한 부조사우(不祧?祠宇)를 중건하여, 매년 음력 9월 12일에 후손들과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모셔왔고, 1947년 종손(宗孫) 재찬 씨가 신주를 모시고 월남하여 사가에 모시기 전까지는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 안자묘가 있을 시에 ‘안자(安子)’의 칭호를 받았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는데, 1917년 공자(孔子) 76대손 연성공(衍聖公) 공영이(孔令貽) 선생이 문성공(文成公)의 신도비명을 찬(撰)한 내용에 ‘안자(安子)’에 대한 내용이 [공영이 선생이 찬한 신도비명의 전문(全文)은 문화유적편 참조] 있다.

기록상 ‘안자(安子)’라는 칭호는 공영이 선생이 쓴 신도비명의 내용 중 처음 등장한다. 이후 1924년 조선총독 사이또(齊藤)가 안자묘에 치제를 올리러 와서, ‘안자묘 대정 13년 2월 15일 조선총독 사이토(安子廟 大正十三年二月十五日 朝鮮總督齊藤實)’라고 현판을 쓰고 갔다. 이를 통해 ‘안자(安子)’라는 칭호가 1924년 이전부터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5) 경기도 의왕시
6. 25 전쟁으로 종손인 재찬(在燦)씨가 문성공의 위패(位牌)만을 봉안하고 남하하여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자리를 잡고 조그마한 규모의 사우를 마련하여, 매년음력 9월 12일에 봉제(奉祭)하다가 현재의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으로 사우가 옮겨졌다. 1975년 음 10월 1일 영주군 순흥면의 순흥안씨 시조공 이하 3, 4대를 단소로써 음 10월 1일 묘사(墓祀) 지내는 좌석에서 ‘순흥안씨대동보’를 편찬하자는 제의가 전국화수회 회장인 안균섭(安均燮)씨로부터 시작되었고, 1976년 3월 7일에 서울에서 전국 순흥안씨 대표자회의를 안균섭 ·안은호(安殷鎬) ·안치연(安致衍) ·안승통(安承通)씨 제위가 주동이 되어 대동보와 동시에 안회헌(安晦軒) 문성공(文成公) 안자묘(安子廟) 건립하기로 결의를 보았다. 종손 재찬씨가 모시던 안자묘 외에 전라도 남원에서 참찬공파 중심 하에 건립한 안자묘가 있었는데, 이 둘을 하나로 합칠 것을 논의하여 여러 곳의 부지를 알아보아, 지금의 의왕시 월암동 425번지 일대의 대지를 매입하고 바로 안자묘 건립을 착수 하였다. 1977년 음 9월 12일 전국 순흥안씨를 위시하여 유림에도 통고하고, 5백 명이 모여 낙성식 겸 기신제를 거행하였는데, 이는 해방 후 처음 한 곳에 모여 제사를 지낸 것이었다.

1980년에는 공자(孔子) 77대 세습 연성공(衍聖公) 공덕성(孔德成)선생이 안자묘(安子廟) 현판을 친필로 써서 보냈는데, 지금의 의왕시 안자묘(安子廟)의 현판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안자묘(安子廟) 비석을 세우고 안자묘의 내력과 연혁을 조각하여 건립하였다. 그 후면에는 종손 재찬씨가 재배근서(再拜謹書)한 문성공회헌안자언행기(文成公晦軒安子言行記)가 한 쪽 측면에는 공자의 76대손인 공영이선생이 1917년 지은 신도비명이 새겨져 있고, 다른 측면에는 공자(孔子)의 77대손인 연성공(衍聖公) 공덕성(孔德成) 선생이 1930년에 쓴 글이 새겨져 있다.[문화유적편 참조]


6) 안자묘(安子廟) 개설(槪說)
안자묘(安子廟)는 우리 안문(安門)의 명조(名祖)이신 문성공(文成公) 회헌선조(晦軒先祖)의 사우(祠宇)로서 보통 평범한 사람의 경우는 자․손․?증손(曾孫)․현손(玄孫) 이후가 되면 신주(神主)를 묘 앞에 매주(埋主)하고 년 1회 시제를 봉행함이 상례(常禮)이나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공헌(功獻)한 업적이 지대한 대성(大聖)이나 대현(大賢)에게 국가가 불체지전(不替之典)을 내려서 신주(神主)를 매주하지 않고 영구히 가묘(家廟)에 봉안하고 기신제(忌辰祭)를 봉행토록 하는 바 이를 불천지위(不遷之位)라고 한다. 그런 연유에서 회헌선조(晦軒先祖)께서 서거하신 지 7백 년이가까운 오늘에도 우리 안문의 후예들은 안자묘(安子廟)에서 회헌선조의 기신제를 봉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후손만대에 이르도록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안문의 명조회헌선조께서 동방의 예의지국(禮儀之國)을 창건하시고 성리학(性理學)의 조종(祖
宗)으로서 국가와 민족번영에 공헌하신 위훈(偉勳)과 유지(遺志)를 길이길이 후세에 이르기까지 영구불별토록 흠모숭앙(欽慕崇仰)코져 국가로부터 특전을 받으신 때문이고, 안자묘를 부조묘(不祧?廟)라 하며 안자(安子)라 함은 대성(大聖)을 지칭하는 칭호로서 중국의 산동성 곡부(山東省曲阜)에 있는 연성부(衍聖府)에서 공자(孔子)의 76대손이신 연성공 공영이(衍聖公 孔令貽) 씨가 회헌선조 문성공은 동방성리학(東方性理學)의 원조(元祖)이며 유종(儒宗)으로서 안자(安子)라 호칭함이 마땅하다 하고 안자(安子)라 칭하여 안자묘현판(安子廟懸板)을 친필로 써서 보내온 것이다.

원래 안자묘(安子廟)는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 진산남록(延白郡 花城面 松川里 鎭山南麗)에 건립 봉안하고 수백 년 동안 대대손손 매년 9월 12일이면 안문의 제자손은 물론 유림현사(儒林賢士)들이 운집하여 회헌선조(晦軒先祖)의 불별의 위훈과 공적을 흠모하여 경건하고 엄숙하게 기신제를 봉행하였으며 연중무휴로 참배객이 부절(不絶)하였을 뿐아니라 서기 1924年 2월 15일에는 일왕 대정(日王 大正)의 소위 조선총독 제등실(朝鮮總督齋藤實)이란 자를 치제특사(致祭特使)로 파견하여 당시의 화폐로 2백원(二百圓)을 제수비 명목으로 헌납(獻納)하고 치제(致祭)를 봉행케 하였는가 하면 일인고관(日人高官)들이 이취임시에는 반드시 안자묘 참배를 의무적으로 이행토록 정하는 등 침략자인 일왕과 그를 추종하는 일
인고관들까지도 위대하신 회헌선조영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45년 8月 15일 국운의 불운이 미진(未盡)함인지 국토와 민족은 남북으로 양분되고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칠백만 대열 속에 안문의 종손(宗孫; 在燦氏)는 대대로 이어받은 선영(先塋)과 사우(祠宇)를 뒤로 두고 회헌선생(晦軒先生)의 위패(位牌)만을 품안에 뫼시고 월남하여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어려운 처지에서도 단 한 차례도 기신제를 궐(闕)하지 않고 봉행함으로써 명문대가(名門大家)의 종손(宗孫)된 도리를 다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형편은 6․5동란 등으로 국가경제는 물론 민생은 호구지책이 없어 기아선상을 헤매며 허덕여야 하는 어려운 실정이어서 안자묘 건립문제는 거론할 처지나 형편이 못되어 불경(不敬)을 범하는 후예(後裔)임을 자책하면서도 안자묘 건립(安子廟建立)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80년대까지 위패(位牌)를 정좌봉안(定坐奉安)치 못함을 개탄(慨嘆)한 나머지 당시의 종친회장 균섭(均燮), 총무 치연(致衍), 재정 상욱․승복(相旭․承福)등 제종원이 안자묘 건립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긴박성을 절감하고 전국 제종원의 출연성금(出捐誠金)으로 소재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425번지 오봉산하에 대지1238평을 매입 현재 안자묘를 건립함으로써 실로 사반세기가 지난 36년 만에 비로소 회헌선조의 위패를 정좌봉안(定坐奉安)하고 기신제를 봉행케 됨으로써 만시지탄은 있으나 안문후예(安門後裔)들로서 회헌선조메 불경을 사죄할 수 있게 되었으며, 후임 덕희회장(德熙), 호양총무, 승복이사 등 제종이 안자묘 동북방 경계에 접한 대지 72평을 추가로 매입하여 총1400평으로 경내를 확장하는 동시에 삼문과 안자묘정비(安子廟庭碑)를 건립하였으며 서기 1985년 후임으로 춘생회장 , 영근상임부회장, 치섭부회장, 응철부회장 등 제종과 호양상임이사, 영배상임이사 및 춘모사무국장 등 제종원이 전국 종원의 성원협조로 출연된 성금으로 안자묘 및 삼문 등의 중수(重修)와 동시에 단청공사를 함으로써 사우(祠宇)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고, 우리 안문의 숙원이던 안자기념관(安子紀念館)을 안자묘하에 건립하여 오문(吾門)의 숙원을 성취하였고 안자묘정비(安子廟庭碑)는 현존 기념관 후편에 묘하동편(廟下東便)으로 이설건수(移設建竪)한 것이다.

이와같이 안자묘 건립으로부터 안자기념관건립(安子紀念館建立)에 이르기까지 역대회장단 및 임직원들의 위선일념(爲先一念)의 노고와 물심양면으로 아낌없는 성원을 베풀어주신 첨종(僉宗)들의 숭조정신(崇祖精神)은 장차 우리 안문을 이어나갈 후세들에게 귀감(龜鑑)이 되고도 남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상으로 안자묘(安子廟)에 관한 개요(槪要)를 약술(略述)하는 바이다.

7) 사우(祠宇)를 세울 때 고유문 서울 도동(桃洞) 《후손 이름을 잃
어버림, 晦軒實紀 卷5》
우리나라는 궁벽한 해외(海外)에 위치하여, 바른 도가 황폐해온 지 몇 천 년이던가. 거룩하신 우리 선조께서 고려 말엽에 태어나 순수한 자품과 독실한 뜻으로 세상을 구제하셨도다. 일찍이 학문에 힘써 성리(性理)와 도학을 연구하였으나, 스승의 전수가 없이 깊은 진리를 혼자서 터득하여 예법에 따라 행동하였으며 그 사람됨은 장중하고 자상하였다. 그 당시 학교가 퇴폐하여져 모두 불교만을 높이자, 개연히 성인의 도를 지키고 사설(邪說)을 배척함을 사명으로 삼아 집안에 공자의 사당을 세워 국학(國學)으로 바치셨다. 그리고 노비를 바쳤고 섬학전(贍學田)을 설치하였으며 공자의 화상을 중국에서 모셔왔고, 제기와 악기,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전주(傳注)를 널리 구하여 구비하니, 이에 학교의 규칙이 새로워졌다. 주자서(朱子書)를 한 번 보고 마음으로 사색하여 독실히 좋아하여 영정을 걸어놓고 사모하며 스스로 ‘회헌(晦軒)’이라 호를 하였으며, “주자는 공이 공자와 짝하니 공자를 배우려면 먼저 주자를 배우라.”

하였다. 주자의 종지(宗旨)를 얻어 사람들을 가르쳐 우리나라에서 비로소 주자학을 알게 하여 유도(儒道)가 어두운 밤의 태양처럼 찬란히 밝아졌다.

효제(孝悌)와 성경(誠敬)을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며 차례에 따라 가르치니 수업의 단계가 문란하지 않았다. 그리고 힘써 의논한 이치는 주자와 부합되었고, 뚜렷한 학문의 연원은 공맹(孔孟)에 이르렀다. 문하에 찾아가 수업한 자가 수백 명이 되어 유도가 성하게 일어났고, 풍속이 일신되었다.

멀리 기자(箕子)를 소급하여 도통을 이어받았고, 또다시 전하여 목은(牧隱)과 포은(圃隱)이 이를 사숙(私淑)하여 더욱 천명되었으며, 조선은 선비가 또 한 성하게 이어받아 학문에 어긋남이 없이 오직 주자만을 숨상하니, 도학의 시조로서 끝없는 은혜를 베풀었도다.

고려조에서 공에 보답하며 성묘(聖廟)에 배향하였고, 이조의 열성(列聖) 또한 더욱 융숭하게 포상하여 사원(祠院)을 창건하자 편액(扁額)을 하사하고 자손을 위하여 은전을 베풀었다

적파(嫡派)의 종손이 중간에 끊어지고 누차 난리를 겪으면서 오랫동안 제사를 받들지 못하자 후손이 이를 조정에 진정하여 특명으로 종손(宗孫)을 세우고 위판(位板)을 모시고 다시 제사를 올릴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사손(祀孫)이 빈한하여 사당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기에 많은 자손이 탄식하며 슬퍼하였다. 이에 사당 건립을 도모하여 재물을 거두고 택지를 마련하여 한성(漢城)을 굽어보는 자리에 사당을 세우니 아홉 칸의 규모이다. 장차 길일을 택하여 영령(英靈)을 모시려하면서 앞서 경건히 고하나이다.

◉. 주자동(鑄字洞 남산 아래) 종가(宗家) 기록 《안응창(安應昌), 拾遺錄》
나의 10대조 경질공원(景質公瑗)은 조선조에 들어와 개성유후(開城留後)가 되었다. 그 장남 참의(參議) 종약(從約)이 비로소 서울[漢都] 종남산(終南山) 아래훈도방(薰陶坊) 주자동(鑄字洞)에 집터를 정하고 송도(松都) 옛집의 재목을 옮겨 집을 짓고 사우(祠宇)를 세워 문성공(文成公)의 영정과 경질공의 신주를 봉안하였다. 그곳은 바로 선조 때 재상 권희(權憘) 집 남쪽 편이었다. 권 재상의 『주자동지(鑄字洞志)』도 왼쪽에 써둔다.

이 집은 처음 홍희(洪熙) 을사년(1425)에 세워졌고 만력(萬曆) 을사년(1605)에 중수하였다. 자손이 대대로 지키고 높은 관직이 이어져 세상 사람들이 ‘복 받은 집[福家]’이라고 하였다. 종손 현감 형(珩)이 후사가 없어 그 아우 감목관(監牧官) 유(琉)가 지중(持重)]하였다. 숭정(崇禎) 병자년(1636)에 난리를 겪은 뒤에 소위 종손 유(琉)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기묘년(1639)에 집을 헐어 재목과 기와를 팔아, 집터가 잡초에 묻혔으니 너무 한탄스럽다. 모든 사물의 이루어짐과 훼손됨이운수가 있는 것인가.

◉. 주자동(鑄字洞 남산 아래) 문성공 가묘(家廟) 《안응창(安應昌), 拾遺錄》
무릇 선현(先賢)의 신주(神主)는 개인 사당에 있어서도 감히 임의로 조천(祧遷)하여 땅에 묻을 수 없고 대대로 사당에 모시고 향사하는 것이 예법이다. 그러므로 나의 선조 회헌선생(晦軒先生)도 초상(初喪) 때 모신 신주는 나라가 바뀐 뒤에도 서울[漢都] 훈도방(薰陶坊) 주자동(鑄字洞) 종손 집 가묘에 봉안하였다. 그런데 여러 차례 병화를 겪으면서 불행하게도 신주까지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너무나 통탄스러운 일이다.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 후손 집에서는 초상 때 신주를 아직도 사당에 모시고 향사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양반 집안 자손이 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온 문중에서 모두 신주를 만들어 우리 집에 모시라고 하나, 지금에 와서 새로 만드는 것은 사안이 중대할 뿐만 아니라 나는 또한 대종가(大宗之家)가 아니다. 적장손(嫡長孫) 명현(命賢)이 이미 후손으로서 살면서 아직 예를 보존하고 있으니, 응당 주자동 구택에 봉안하여야 하겠으나, 구택이 이미 다 무너졌고 그의 생활도 매우 곤궁하여 형편상 다시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올릴리 만무하다. 이런 점이 있어도 종손이 아니면서 선조의 신주를 받드는 것은 예법에도 크게 어긋나고 또한 적장과 종통을 빼앗는다는 혐의가 있어 결코 봉행할 수 없었고 이치에 따라 따르지 않았다.

다만 옛날에 훌륭한 유학자의 영정을 모시고 존경하는 예를 표한 사례가 있으니, 선조의 영정을 모시고 사모하는 마음을 표하는 것은 어느 정도 혐의가 없고 또한 자손으로서 응당 할 책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난 기해년 4월 24일 선조의 영정 한 폭을 모사하여 가묘에 모시고 길이 제사를 올리려는 참이다. 이것이 비록 예법에 실려 있는 사안은 아니지만 사람의 뜻도 예의 한 부분이다. 이 일을 하고서 한편으로 이 일을 듣거나 본 자들이 혹 시비를 논하는 자가 없지 않을 듯하여 전말을기록하여 예를 아는 자에게 질정을 받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