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응창 선조가 1760년에 만든 순흥안씨 보유록은 문성공선조의 후손에게 나라에서 내린 대우로 군역을 면하게 하는 기록으로 그 내용을 발문(跋文)을 통해 보면, 얼마나 문성공의 은덕이 높고 깊은가를 알 수 있다. 여기 일부를 발췌한다.

[보유록 발문]
대군사부 안응창(安應昌)이 하나의 문자를 가져와 내게 보이면서, “국가에서 우리 선조 문성공이 사문에 공이 있다고 하여 자손으로 하여금 군역을 면제하게 하라는 명을 내려, 지금까지 수백 년간 이를 법으로 시행하려 왔었는데, 이번에 새로이 기강을 개혁하는 초기에 유사가 이에 대한 개정을 건의하여 그의 강경한 주장을 저지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조종고사에 관한 사례를 들어, 이에 대한 상소를 하려고 대신을 차례로 방문하며 도움을 구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의 선고 상국께서 정승을 버리고 솔선하여 상소문을 초하였고, 많은 대신 또한 모두 이에 연명하여 상소를 함으로써 마침내 유사의 건의가 좌절되었다. 이는 다만 안씨 자손이 길이 백세토록 덕을 입는 것이 아니라, 열성조의 명 또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모두가 누구의 힘이겠는가. 이에 장차 조종의 교지(왕명)와 이에 관한 논고를 책으로 간행하여 국가의 총애에 뜻을 오래 보본하고자 하나니, 그대는 한 마디 말로써 기술해 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내가 그 유사의 계목과 대부의 의논을 살펴보니, 더러는 법으로 엄격하게 하였고, 더러는 은혜를 베풀기도 하였다. 하늘이 백성을 냄에 각기 직분을 부여하였으므로 비록 열성(列聖)의 후예라도 군역을 면제하지 않는데, 어찌 안씨 자손만 오직 유독 면제할 수 있겠느냐는 말은 핵심으로서 이치에 가까우나, 차라리 얼마의 군사를 잃을지라도 선비를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훼손시킬 수 없다는 것은 국가를 위한 깊은 생각이다. 당시에 완급, 득실의 문제가 없지 않으나 국가의 체모로써 말한다면, 한 성씨가 군역을 얻음으로써 조종(祖宗)의 명과 표창하는 법을 훼손하게 되니, 이에 대하여 득실을 비교하면 과연 어떠한가. 그러나 이는 모두 성상(聖上)이 조종(祖宗)의 마음을 체득하여 현명하게 위에서 결정한 것이다.

아, 안씨 자손이 너그러운 은혜만을 믿어 태만에 빠지지 말고 유사의 말을 항상 생각하며 마음을 밖아 문성공이 남긴 단서를 계승한다면, 유사의 건의도 안씨에게 너무 엄격하게 함이 아닐 것이니, 이 점에 서로 힘써야 할 것이다.

계미년(1643) 중추 상순에,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삼가 쓰다.

[보유록 발문]
보유(保宥)란 무엇인가. 안문성공(安文成公)의 후예들에게 대대로 군역을 면제하도록 한 것을 말한다. 선생의 도가 높고 덕이 융성하여 사문(斯文)에 공을 끼쳐조종조에서 그 자손을 대우한 것은 바로 현인을 높인 것이고, 현인을 높인 것은 바로 성인을 높인 것이다.

지난번 세 대신(大臣)의 의논으로 인하여 성상께서 특별히 명을 내려 거듭 열성(列聖)의 명을 밝혔으니, 이에 안씨 문중이 길이 은혜를 입게 되었다.

나는 이 성상의 한 말씀에 세 가지의 아름다움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도를 중히 여기는 마음을 독실하게 한 것이 첫째 아름다움이며, 선왕(先王)의 법을 따름이 둘째 아름다움이며, 차라리 군정에 조금 소홀하더라도 현인의 후예를 보호한 것이 셋째 아름다움이다. 이러한 성상의 덕은 사관이 대서특필(大書特筆)하여야 하며, 한 번 써서 후인에게 알리지 않으면 어찌 안씨 한 집안의 세습을 통하여 후세에 전해지는 일이 될 뿐이겠는가.
금화(金化) 안사군(安使君)은 군자이다. 이 책을 만들어 그 사이의 전말을 기술함이 어찌 그의 후예에게 이를 믿게 하여 걱정이 없게 한 것일 뿐이겠는가. 장차 후인에게 격려하여 선조에게 욕됨이 없게 하고자 함이며, 국은에 감격하여 보답하고자 함이리라.

그러므로 이 기록이 전해지는데도 만일 학문에 태만하거나 국은의 보답에 소홀히 한다면, 이는 안사군의 본의가 아니며 선생의 영령 또한 지하에서 통탄할 것이니, 그 자손된 이로서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랴. 사또의 이름은 안응창(安應昌)이다.

병술(1646) 중동 상순에, 의정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삼가 쓰다.

[조선왕조실록 보유기록]
태종 2년 8월 정해에 왕이 태학에 행차하여 친히 석전례(釋奠禮)를 행하고 하교하기를, “문성공 안향(安珦)이 학교를 일으키고 가르침을 베풀었으니 모든 왕이 본받을 바이다. 그 공에 보답하는 은전은 의당 후손까지 미쳐야 할 것이니, 공의 자손은 서자라도 영원히 천역(賤役)에 속하지 않게 하고, 적손은 대대로 부역을 면제하여 동서반(東西班)에 등용하라.” 하였다.

太宗大王二年壬午八月丁亥。上幸太學。親行釋奠禮。教曰文成公安珦。興
學設教。百王可範。報功之典。當及苗裔。其子孫。雖孼永勿屬賤役。嫡孫
則世世蠲復。錄用東西班。

명종 7년에 군적을 작성할 때 하교하기를, “문성공 안유(安裕)의 자손은 별도로 책을 작성하여 강무의 대열에 넣지 말고 제외하여 거론하지 말 것이며, 동서반등용에 관하여서는 조정의 하교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선조 6년에 군적을 작성할 때 하교하기를, “문성공 안유의 자손은 별도로 책을 작성하여 강무의 대열에 넣지 말고, 이를 영원히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인조 4년 11월에 교지를 내려 “문성공 안유의 자손들은 또한 교지에 의하여 시행토록 하라.”고 전하였다.

숙종 8년 9월에 전교하기를, “문성공 안유의 자손들은 특령으로 군역에서 제외하고, 현인으로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영조 35년 3월 왕이 명하기를, “문성공 안유의 자손은 천역을 시키지 말라는 명에 따라 시행하되, 팔도병마절도사에게 영을 전하라.” 하였다.

정조 3년 8월에 병조판서 정상순이 “문성공 안유는 그 도덕이 성인을 지켰으며, 그 공적이 후세에 전해지니 어찌 참으로 분명하게 드러난 분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백세토록 은전을 주시는 것은 그 자손의 누누히 진언하는 것을 기다릴것도 없거니와 천역에 함부로 편입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더구나 열성조에 교지받은 것이 법전이 되고 있으니, 이르게 문교를 일으키는 시대에 더욱이 보호하여야할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거주하는 읍에 명하여 천역에 거론하지 말도록 각도에 분부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하니, 전교를 내려 “그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순조 19년 3월 27일에 형조판서 흥희신이 “문성공 안유의 자손에게 군역을 면제하라는 열성조의 명이 있었으니, 상세히 조사하여 면제하라는 뜻으로 신에게 분부함이 어떠합니까”라고 아뢰니, “그대로 따라서 행하라”고 교시하였다.

고종 5년 무진년 3월에 형조판서 유진오가 “문성공 안유의 후손은 대대로 동서반에 등용하라는 전후 열성조의 명이 명백한 기록으로 남아 있으니, 이들에게 천역을 시키지 않아야 할 것이므로, 본도로 하여금 이를 시정케 함이 어떠하십니까”라고 아뢰니, “아뢴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