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몽고의 침략
 안향은 1231년 몽고가 처음 고려의 땅을 짓밟은 이래 수차례의 침입이 지속되었던 시절에 태어났는데(1243) 고려 조정 내부로는 무신의 집권이 세습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몽고의 병화로 대구 부인사에 보전되어 있던 대장경판이 불타고 경주 황룡사의구층탑이 불탔으며, 인명피해도 막심하여 『고려사』에 의하면 이때 포로가 된 자의 수는 무려 20만6천8백 여 명에 이르고 죽음을 당한 사람들 또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몽고군은 매년 침입해왔는데 1257년에는 피난 수도였던 강화정부 내에서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 왕정복고가 드디어 이룩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거쳐 고종 45년 11월 고려는 몽고와 화친하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2) 삼별초(三別抄)의 난
 그러나 고려의 조정에는 무신정권의 후예로서 대몽항전을 주장하는 강경파와 국왕인 원종(元宗)을 중심으로 한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몽고와 화친하는 수밖에 없다는 화친파로 국론이 나뉘어 있었다. 이렇게 하여 개경환도가 지연되고 있던중 원종 10년에 임연이 원종을 자리에서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왕으로 추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몽고는 임연을 위협하여 다시 원종을 복위시키니 이에 왕은 몽고에 입조하였다가 다음해에 돌아왔다. 이에 원종은 돌아오는 길에 개경에 머물면서 환도를 선포하였다. 이로써 개경에의 환도를 실현하고 몽고와의 완전한 강화를 성립하고자 하는 화친파와 항전파 사이의 분열은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개경환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것이 삼별초의 난이다. 삼별초(三別抄)란 최씨정권의 무력적 기반이었던 별초를 일컫는 것이었다. 별초란 정규군대(常規兵)와 구별되는 최씨 무인정권의 사병부대로서 창설되었을 때인 명종․신종 연간에는 야별초라 칭하였다. 이러한 야별초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좌우 이별초로 나뉘게 되고, 이어 몽고의 침입 때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자를 신의군이라 하여 위의 좌우별초와 함께 삼별초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무신집권 밑에서 세력을 잡았던 그들의 지위가 개경환도와 더불어 떨어질 가능성이 크고 또한 그들은 원나라에 대하여 강경책 일변도의 정책을 주장해왔던 만큼 정치판도가 새로이 변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세력의 종지부를 의미하였기 때문에, 정권기반을 포기하는 것이 무척 두려웠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어난 것이 이른바 삼별초의 난이다. 즉 삼별초의 지휘관 배중손(裵仲孫)은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삼고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삼별초의 난으로 조정의 신임이 두텁게 된 이가 바로 안향이었다. 안향은 다른 문무백관들과 더불어 강화에 억류되어 있었고 난군들은 안향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일찍이 안향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는 삼별초 장수들은 그를 중용하기 위해 여러 차례 협박도 하고 달래기도 하였으나 회유되지 않았다. 그래서 군중에 명을 내려 “안향을 놓아주는 자는 크게 벌하겠다.”고 하였으나 안향은 계책을 써서 그곳을 무사히 탈출하여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이로부터 왕은 안향을 더욱 신임하게 되고 곧이어 그는 감찰어사가 되었다. 그러나 안향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안향이 정계에서 활약할 때는 고려가 무신정권의 독재에서 벗어나 당시의 국제정치에 순응하여 개경으로 다시 나와 새로운 정치질서를 세우려고 하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