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말하기를,

“회헌(晦軒)선생은 도덕(道德)과 사공(事功)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하였다.

◉ 문장공(文壯公) 둔재(遯齋) 성세창(成世昌)은 말하기를,

“백두산(白頭山)은 저 먼 북쪽에서 크게 솟았으며, 그 남쪽가지가 높이 솟아 달려와 바닷가를 따라 아득히 강원도에 이르러 크게 솟았는데, 가장 빼어나고 웅장한 것을 금강산(金剛山)이라 하며, 또 남쪽으로 달려와 삼척 (三陟)에 이르러 큰 산이 뭉쳤는데, 하늘가에 높이 솟은 것을 태백산(太白山)이라 한다. 다시 산세가 뻗어 남쪽으로 내려와서 정기를 감추고 흩어지지 않은 것을 소백산(小白山)이라 한다. 산가지가 감돌아 골짝이 깊고 그윽하며, 또 맑은 물이 그 앞을 감돌고 비추는 것이 있는데, 이를 죽계라 한다. 그러하니 맑은 기운이 크게 뭉쳐 마땅히 대인군자(大人君子)가 되어서 문운(文運)을 붙들고 교화를 일으켜, 이 도(道)를 무궁한 후대에 전할 만하다. 우리 문성공(文成公)은 실로 특이한 기운을 받고, 이 땅에서 태어났다.” 하였다.

◉ 문민공(文敏公)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은 말하기를,

“회헌 안선생은 가신 성인을 계승하고 오는 학자들을 열어주어, 사람들을 위하여 표준을 세우고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열어주었으니, 참으로 동방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라 이를만하다.”하고, 또 선생에게 올린 제문(祭文)에서,“능히 회옹(晦翁)을 사모하여 우리 유도(儒道)가 동쪽으로 전해왔네. 훌륭한 경학(敬學)은 백세의 조종이라오.” 하였다.

◉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소백산 유람기」에서,

“죽계의 여러 안씨들은 이 산 아래에서 빼어난 정기를 받고 태어나 이름이 중원(中原)에 진동하였다.”하였다.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올린 제문(祭文)에서는 “이 도(道)를 존신(尊信)하여 가르침을 우리나라에 밝히시니, 공(功)이 학교에 남아 있어 백세에서추앙하네.” 하였다.

◉ 상국(相國) 심통원(沈通源)은 소수서원 제문에서,

“학문은 공맹(孔孟)을 이었고, 마음은 자양(紫陽 주자(朱子))을 전하셨네. 우리 후학들을 열어주어 모두 향방(向方)을 알게 하셨네.” 하였다.

◉ 문정공(文正公)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화상찬(畵像贊)에서,

“사문(斯文)에 영원한 공이 있어 성인의 사당에 올라 보답하는 예가 융숭하도다.” 하였다.
금계(錦溪) 황준령(黃俊良)은 “삼한(三韓)의 누추한 풍습을 깨끗이 씻어 문화의 나라로 만들었다.” 하였다.

◉ 문간공(文簡公)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소수서원 제문에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문헌의 성함이 중국을 능가하게 하였으니, 그 덕학(德學)과 유범(遺範)은 곧바로 소백산과 함께 드높고 죽계의 물과 더불어 영원히 흐르리라.” 하였다.

◉ 문강공(文康公)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지은 신도비에서,

“학문과 도덕은 하늘에 나열되어 있는 여러 별처럼 빛난다. 묘정(廟庭)에서 백세토록 제향을 받아 곧바로 문선왕(文宣王) 공자(孔子))의 가르침과 영원히 전하리라.” 하였다.

◉ 원나라 학관(學官)은 선생이 논한 이기설(理氣說)이 주자의 말씀과 부합함을 보고는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선생은 동국의 회암(晦菴)이라 할 만하다.” 하였다.

◉ 명(明)나라 육부정 세의(陸桴l亭 世儀)가 찬(撰)한 기록에는

“해동이 오랑캐 풍속에서 깨끗이 탈피하여 우뚝 솟아나게 하였으니, 선생이 아니면 그 누가 이렇게 했겠는가. 나는 지금부터 염락(濂洛 정주(程朱))의 도가 멀리 동쪽으로 전하여 조선에서 크게 떨치게 되었으니, 회암 뒤에 다시 회헌(晦軒)이 있기 때문임을 알았노라.” 하였다.

◉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송경유허비문(松京遺墟碑文)」에서는

“선생의 유택(遺澤)은 태산교악(泰山喬嶽)과 같고 큰 내와 같으며, 선생의 도는 태양과 별이 하늘에 걸려있는 것과 같다. 이 지역은 바로 공자가 출생한 궐리(闕里)와 같고, 주자가 태어난 신안(新安)과 같다.” 하였다.

◉ 문정공(文正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찬문(贊文)에서,

“안문성공(安文成公) 회헌(晦軒)선생은 홀로 우리 도(道)를 붙들어 찬란하게 다시 밝게 하였다. 덕이 깊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격양시에 이르기를‘임금의 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였으니, 하늘의 공은 계산할 수가 없고 땅의 덕은 측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자와 주자가 이미 별세함에 도학(道學)이 오직 우리 동방에 밝혀졌으니, 안 선생이 존화양이(尊華攘夷)한 공로가 아니었더라면 아직도 더러운 오랑캐의 행실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 지호(芝湖) 이선(李選)의 문집에서는,

“안문성공은 맨 먼저 정학(正學)을 창명하고 불교를 강력히 배척하였으며, 학교를 창립한 공로가 백세에 기록할 만하므로, 헌묘(獻廟) 태종(太宗))은 특별히 표창하여 후손들을 녹용(錄用)하도록 하였다. 성종께서는 경영관(經筵官) 흥귀달(洪貴達) 등의 건의에 따라 묘역을 수치(修治)하고 초군목동(樵軍牧童)들의 출입을 금하게 하였다. 선배들은 대부분 그 시대와 사적을 상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의 학문과 공렬(功烈)을 아는 자가 적어 왕왕오로지 포은(圃隱)만을 찬미하여 동방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라 하는데, 실은 문성공이 더더욱 어려운 일을 한 것이다.” 하였다.

◉ 문정공(文靖公)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찬문에서,

“옛날 회헌부자(晦軒夫子)는 드높이 해동의 유종(儒宗)이 되었다.” 하였다.

◉ 문정공(文正公) 도암(陶菴) 이재(李縡)는,

“하늘은 성인의 도를 땅에 떨어뜨리려고 하지 아니하여, 회헌선생을 탄생시켜 끊어진 도를 잇고 무궁한 학문을 열어놓았으니, 실로 동방 성리학(性理學)의 조종이 되셨다.” 하였다.

◉ 문원공(文元公) 역천(櫟i泉) 송명흠(宋明欽)은 『실기』 서문에서,

“만일 이윤(伊尹)의 뜻을 세우지 않고 안자(顔子)의 학문을 닦지 않는다면 선생의 전체(全體)를 알지 못할 것이며, 선생을 알지 못한다면 또 어떻게 주자를 알겠는가.” 하였다.

◉ 효안공(孝安公)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는 『실기(實記)』의 서문에서, “맹씨(孟氏)가 공자(孔子)를 높인 것은 노(魯)나라와 가까운 추(鄒)나라에 있었는데, 공(公)이 주자를 높인 것은 해동 1만여 리의 외국에 있었으며, 맹씨가 공자를 높인 것은 증자(曾子)와 자사(子思)의 전수한 나머지에서 얻었는데, 공이 주자를 높인 것은 오랑캐와 불교가 온통 세상을 뒤덮던 가운데에서 얻었으니, 가령 맹씨가 공을 만났다면 또한 어찌 스스로 흥기한 호걸스러운 선비라고 허여(許與)하지 않았겠는가.” 하였다.

◉ 농와(聾窩) 이언순(李彦淳)이 지은 「송경여항비(松京閭巷碑)」에서는,

“선생이 아니었으면 우리나라 수천 리가 장차 머리를 풀어뜨리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오랑캐의 풍속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 귀연(歸淵) 김근순(金近淳)이 지은 「부조묘상량문(不祧l廟上樑文)」에서는,

“삼가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강하(江河) 산악(山岳)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시어 도가 태양과 별처럼 밝으셨도다. 현관(賢關 성균관)에서의 취향이 편벽되지 아니하여 한몸으로 이 도(道)를 자임하였으며, 학해(學海)의 연원이 정대하여 만세를 위하여 태평(泰平)을 열어놓았도다.” 하였다.

◉ 문충공(文忠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은 “성인의 도를 보호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도학의 근원을 열어놓았다. 그 공로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하였다.

◉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지은 『실기』 서문에서는,

“회헌선생은 우리나라에 처음 나오신 성리학의 조종이다.” 하였다.

◉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가 지은『실기』 서문에서는,

“주자의 학문이 밝지 못하면 공자의 도가 높여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자학은 실로 회헌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였다.

◉ 창산(滄山) 이상영(李商永)이 지은 『실기』 발문에서는,

“공자의 도를 넓힌자는 주자요, 주자의 도를 넓힌 자는 안자(安子) 이다.” 하였다.

◉ 청산(晴山) 권상익(權相翊)이 지은『실기』 중편(重編) 서문에서는

“선생은 고려 말기 어둡던 시기에 태어나 유학(儒學)을 열어놓고 학정(學政)을 창립하였으며, 공씨(孔氏)를 조종으로 삼고 주자를 높여 동방 도학의 조종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우리 유학계에서 똑같이 칭찬하는 바요, 온 천하에서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다.” 하였다.

◉ 연성공(衍聖公) 공영이(孔令貽)가 지은『도통사삼성현연보(道統祠 三聖賢年譜)』의 서문에서는

“고려 회헌(晦軒) 안자(安子)의 학문은 오로지 주자를 높여 위로 성인의 도를 바랐으니, 스스로 스승을 얻었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 태사(太師) 공상림(孔祥霖)이 지은 서문에서는,

“안자의 성경(誠敬)의 학문과 극치(克治)의 공부는 동방 도학의 조종이 된다.” 하였다.

◉ 연성공(衍聖公) 공덕성(孔德成)의 찬문에서는,

“여러 성인을 집대성한 것은 공자요. 여러 현인을 집대성한 것은 주자이며, 공자를 조종으로 삼고 주자를 높여 동방의 성학(聖學)을 열어놓은 자는 안자(安子)이다.” 하였다.

衍聖R公孔德成贊曰。集群聖之大成者。孔子也。集群賢之大成者。朱子也。祖孔宗朱以啓東方之聖學者。安子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