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7년 7월 11일 순흥에서 일어난 단종복위운동은 우리 순흥안씨 수난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이를 일명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일컫는다. 이 사건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h세조의 왕위찬탈(1455),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1456), 송현수(宋玹壽) 역모조작사건(1457)에 이어 이 정축지변으로 금성대군의 죽음에 그치지 않고 유배지 순흥을 220여년간 폐부시키고 선조들이 참화를 당하였으며 뿔뿔이 흩어지고 다시 돌아보지 못해 묘소가 실전되는 등 고난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1) 단종복위운동의 역사적 배경
(1) 단종의 즉위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1450년 2월 세종대왕의 장자 문종이 즉위하였다. 문종은 오랫동안 세자를 지내며 세종의 가르침을 받아 현군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부왕 세종의 병환과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 2파 7세 안천보(安天保) 사위 심온의 딸)의 상사로 병을 얻어 2년 3개월을 재위하고 1452년 5월 세상을 떠났다.

세종대왕은 세자(문종)의 병약과 세손(단종)의 유충함을 염려해서 당신 사후의 일을 유언으로 부탁한다. 이 때 대표적인 탁고지신(託顧之臣)은 황보인 ․ 김종서 등 관료들이었다. 또 문종도 어린 세자를 염려한 나머지 정인지 ․ 신숙주 ․ 박팽년 등 여러 신하를 불러 국사를 의논하며 후일의 어린 군주 단종의 뒷일을 늘 부탁하였다.

소위 황보인 ․ 김종서 등 세종 및 문종의 고명대신들은 어린 단종을 보살피면서 야심있는 왕자들의 세력을 항상 주의 깊게 견제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영특하고 야심에 찬 왕자들은 독자적으로 힘을 키우면서 서로가 왕위를 넘보고 있었으니, 가장 걸출했던 왕자는 수양대군 유(瑈)이었다. 세자 단종이 12세로 왕위에 오를 때 수양대군은 36세, 안평대군은 35세, 금성대군이 그 아래였다.

이때 수양은 김종서 제거를 집권의 최대 승부처로 보고 1453년 10월 수양은 양정과 종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김종서에게 줄 편지가 있다며 종을 가까이 오게 한 후 종이 철퇴로 김종서의 머리를 치고 이를 막는 아들 김승규도 내리쳤다. 이것이 계유정난의 시작이다.

김종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단종은 수양의 손을 잡고, “숙부는 나를 살려주시오.”하고 빌었다. 수양대군은 대신들을 급히 불렀고, 영의정 황보인 ․ 우찬성 이양․ ․ 병조판서 조극관 등을 대궐로 불러들여 죽였고 윤처공 ․ 이명민 ․ 조번 ․ 원구 등 의 집으로 보내 이들을 때려 죽였다.

다음날 날이 밝자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가 되었고 이조․h병조의 판서까지 겸하여 모든 정치를 관할하고 인사권과 병권을 장악했으니 ‘왕’이란 말을 붙이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상 임금이나 다를 바 없었다. 김종서 부자․h황보인 등 10명 가까운 사람들의 머리는 저자에 내다 걸었고, 많은 사람이 교형 당했고, 멀리 귀양을 갔으며, 가족들은 사형 당하거나 노비가 되어 끌려갔다. 또한 안평대군도 곧 이어 교형에 처해졌다. 반면 43명의 정난공신(靖難功臣)이 책봉되고 그들에게는 후한 상이 내려졌다.

 
(2) 금성대군의 순흥 유배
1455년(단종 3) 수양은 계유정난에 불만을 품고 자기의 전횡을 비판해 온 넷째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몰아내기로 하고 사돈인 우의정 한확 등 몇몇의 정난공신과 단종을 압박했다.

어리고 힘없는 단종은 할 수 없이 금성대군을 유배시키고 바로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단종 3년(1455) 윤 6월 11일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때 좌익공신(佐翼功臣)이 46명이 생겨났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지 꼭 1년 후 1456년(세조 2) 6월 1일 성균관사예 김질의 밀고에 따라 6월 2일 반대세력인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 유응부 ․ 이개․ ․ 유성원 등을 제거하기 시작하여 아우 금성대군이 사육신 사건에 관련있다 하여“고신을 거두고 영방안치하라.”는 교지를 내려 같은 해 6월 27일 당시 유배지였던 광주조소에서 다시 멀리 소헌왕후인 어머니 외가 곳 안씨가 사는 경상도 순흥 땅 패도로 이배되었다. 패도(貝島)는 죽계천에 있던 명목상의 섬에 지나지 않았으며 지금도 ‘조개섬’으로 논 가운데 남아 전해오고 있다.

또 집권세력은 세조가 집권한 윤6월 11일부터 8월까지는 의정부와 육조 ․ 승정원 ․ 종친부 등에서 30여 회나 연이어 주청상소 등으로 반대세력 제거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한편 귀양 가 있는 금성대군의 사사와 단종 피위(궁에서 떠남)를 끊임없이 주청한 사실이 『왕조실록』에서 무수히 보일 뿐아니라 사건 종결 때까지는 무려40여 회에 이른다.

세조가 듣지 않자 세조 3년(1457) 6월 21일에 단종의 장인이었던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역모사건을 조작하여 교간에 처하고, 화의군은 금산으로, 한남군은 함양으로, 영풍군은 임실로, 정종(문종의 부마)은 광주로 유배시켰다.

마침내 세조는 백관들의 반복적인 주청에 따라 송현수 사건에 연루시켜 상왕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해서 6월 21일에 영월의 험한 산간벽지인 남한강 상류 강물로 에워싸인 한적한 내륙 고도인 청령포(淸泠h浦)로 유배시켰다.
 
2) 순흥의 단종복위운동 전개
조선왕조 500년 동안 단종의 폐위와 죽음 ․ 계유정난 ․ 사육신사건 ․ 순흥의 정축지변을 더한 피의 역사는 없었다. 어린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영월로 유배되어 유명을 달리하는 동안 왕실에서는 혈육 간의 살륙과 유배 등이 연이어 일어나고, 조정에서는 대신들의 권력암투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순흥의 단종복위 거사는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한 상왕복위 운동이다.

1457년 6월 21일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오자 이때 영남의 순흥도호부에서는 1456년 6월에 이미 귀양 와 있던 세종대왕의 여섯째 왕자인 금성대군과 이보흠(李甫欽) 부사는 모복상황(謀復上王)의 대의를 받들고 분연히 일어나 눈물을 적시며 강개한 뜻을 함께하고, 이곳 기관 정중재 ․ 품관 안순손(安順孫) ․ 안처강(安處强) ․ 안효우(安孝友) ․ 김유성 ․ 황징 ․ 신극장 및 향사 김근 ․ 안당 ․ 김각 등과 벼슬을 버리고 단종을 따라 순흥과 인근처로 낙향한 허방 ․ 허윤공 ․ 송계 ․ 송인창 ․ 전희철 ․ 이수형 ․ 서한정 ․ 정사종 등등 많은 추종 세력 그리고 남중인사들이 함께 단종복위 운동에 동참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루는 대군이 이보흠을 불러 좌우를 물리치고 격문을 초하게 했는데 “천자를 모시고 제후를 호령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으리요.” 하였다. 이 두 사람은 군사동원 및 영 ․ 호남의 충의지토의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작성하고, 부민들을 규합하여 단종복위의 거사계획을 도모하였다.

거사추진 계획은 삼남에 격문(檄文)을 보내 의사를 규합하고 의기남아 300여명을 포함 500여의 순흥 군사를 동원 이웃 고을을 점령하며, 풍기와 문경 군사를 동원하여 죽령과 조령을 봉쇄하고는 영월의 단종을 순흥으로 모셔다 조정을 세우고 사태가 성숙되면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때 금성대군과 거사모의를 몰래 숨어서 엿들었던 순흥 관노 급창이 대군의 시녀인 김련과 내통하여 대군이 깊이 잠든 사이에 격서(檄書)를 훔쳐내어 관노 급창에게 전달하고 급창은 그 길로 급히 한양으로 달려갔다.

이른 아침 격서가 없어진 사실을 안 대군이 급히 이부사에게 알리고, 긴급 대책을 세웠다. 관노 급창의 소행으로 바로 알아차린 이부사는 절친한 사이로 평소에 아끼며 환로(宦路)를 열어주었던 이웃 기천현감에게 알리고, 서신을 받은 기천현감 김효흡은 잘 달리는 말을 갈아타며 추격하여 급창을 붙들어 격문을 빼앗었다.

그러나 이때 현감 김효흡이 변심을 했다. 격서 내용이 단종복위의 역모이므로 큰 벼슬과 영화를 얻을 욕심에서 이부사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 길로 바로 상경하여조정에 고변하였다.

이로써 단종을 순흥으로 맞이하려는 준비의 기회가 무르익던 가운데 단종복위 거사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는 비운을 맞게 되어 금성대군은 안동도호부의 감옥으로 이송되고, 이부사는 현지 국문 후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박천으로 유배되 후일 모두 죽었다.

순흥은 단종모복 거사가 뜻밖의 밀고로 발각 역향(逆鄕)이 되어 1457년 7월 11일 1차로 안동관군의 피해도 컸지만 2차의 한양 철기군의 창칼 아래 65호가 죽임을 당했다고 「대평서당기」가 전하고 있다. 특히 순흥을 관향으로 한 이곳 지지세력이었던 토호 안씨(安氏)를 위시하여 수 백 부민들이 참살되었다고 전한다. 『세조실록』의 14명은 조정의 국문에 의한 처형자들에 불과하다.

순흥도호부는 8월 2일에 혁파(革罷)되어 관아는 불타 폐허화 되고, 사민들은 거의 참화를 당하니 유혈이 성천하여 죽계수가 혈류로 변하여 영천의 제민루까지 흘러내리고 민가가 소탕되어 황폐한 벌판이 되었으며, 순흥부는 풍기 ․ 영천 ․ 단양 ․ 봉화 ․ 영월 등에 분할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영남일대에서는 금성대군의 일을 감히 말하는 자 없었고 다만 민심이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그리고 단종의 외가인 안동에서는 외숙부 권자신 ․ 자근 형제와 외조모, 조카도 모두 참화를 당했다.

이 정축지변의 기록은 『자향지』 ․ 『흥천지』 ․ 『금성대군실기』 ․ 『연여실기술』 ․ 『장릉지』 ․ 『대동운옥』 ․ 『청야만집』 ․ 『동국역대총록』 ․ 『대평서당기』 ․ 『동학지』 등 등 수많은 야사들은 당시 순흥거사 및 부민들의 참혹했던 수난사와 절의를 지킨 선비들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어 순흥사건을 더욱 밝게 조명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세조 및 정조 실록, 규장각기록, 어제충신열전(정조)과 그 외 많은 야사와 구전으로 해명되고 있다.

 
단종(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최후
1457년 10월 세종과 문종의 고명신하이기도 했던 정인지 ․ 신숙주 등의 간곡한 주청에 따라 종사에 죄를 지었다는 구실로 단종은 폐서인 되고 사사령이 내려 금부도사 왕방연이 영월에 도착한 10월 24일 관풍헌 뜰 앞에서 사사되어 강물에 던져지니 나이가 17세였다. 이때 엄흥도(嚴興道)가 후환의 두려움을 안고 단종시신을 수습하여 엄씨 선산에 몰래 매장하고 자취를 감췄다. 『세조실록』에서는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서 죽으니 예로서 장사 지냈다.” 하였으나, 거짓 기록으로 보인다.

금성대군은 10월 21일 안동도호부의 안기역에서 역당의 괴수로 사사되었다 하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금부도사가 전패(殿牌)를 배설하고 “금성대군은 전패를 향하여 사배한 후 어명을 받으라.”함에 대군은 “우리 임금은 영월에 계신다.”하고 영월을 향해 사배한 후 통곡하며 “신하가 신하 된 도리 못하고, 계교를 이루지 못한채 화가 먼저 이르도다.”하며 약그릇을 들어 마시니 향년이 32세였다. 당시 사람들이 사후에 그 시신을 감히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에 묘도 전해 오지 않는다.

다음해인 1458년 7월 8일 성주 ․ 월항 선석산의 세종대왕자 태실 중에서 금성대군의 태실이 철거되고, 또 노산군의 태실(범림산)도 철거되었으니 권력투쟁의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서 죽은 안평대군을 제외한 다른 대군들은 세조의 편에 가담하여 현실의 권세를 누렸으나, 홀로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아버지 세종과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조카인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3) 순흥 단종복위운동의 역사적 의의
 
세조의 왕위 찬탈로 빚은 골육상잔의 최종 목표가 단종의 제거임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친형제 간인 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와 배다른 동생인 한남군과 영풍군, 단종의 외척 및 처족 ․ 사육신 등 피의 숙청을 야기 시키고, 단종의 죽음과 함께종결되었다.

그리고 금성대군의 순흥사건은 대군의 죽음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유배지인 순흥을 220여 년간 사라지게하였으니 즉 순흥도호부의 폐부였다.

순흥의 단종모복 운동은 관민귀천을 총망라한 규합된 저항세력으로 신 ․ 구세력 간의 마지막 대결로서 그 역사와 사회 사상사적 의의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그리고 앞선 사건들은 모두가 조정의 관리들이 한양을 중심으로 일으켰으나, 순흥거사는 왕자와 부사․h선비와 호족․h관리와 상민 그리고 노비들까지 귀천이 함께 참여한 지방의 범 저항세력은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단종의 폐위와 죽음보다 더한 피의 역사는 없었다. 왕실에서는 혈육 간의 피버린내 나는 살육과 유배 등이 연이어 일어나고, 조정에서는 대신들 간에 권력의 암투로 무고한 사람이 많이 희생되었다. 계유정난과 사육신의 단종 복위사건․R단종외척의 피화사건과 순흥의 정축지변을 통해 사육신 ․ 생육신 ․ 단종절신 등의 새로운 이름이 생겨났다. 단종절신은 단종에 의리를 지킨 신하들을 일컫는 말이다.

순흥의 단종복위 운동을 통해 단종에 절의를 지킨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단종이 있는 영월과 가까운 순흥으로 모여들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영주지역을 대표하는 문중들은 단종절신(端宗節臣)의 후손들이며, 안동의 단종절신 이계양(李繼陽)은 퇴계선생의 조부이고, 김한계는 학봉 선생의 고조부가 되는 등 단종절신들의 정신적 뿌리에서 시작하여 후일 영남학파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단종상왕의 복위계획은 사전에 탄로되어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특히 격문에서 요새인 ‘조죽양령(鳥竹兩嶺)’을 막는다 했으니, 순흥의 서쪽 20리인 죽령 어구에 있는 기천현감은 주모자인 이부사와 절친한 사이라 말할 것도 없거니와 풍기 및 문경 군사의 포섭은 절대적인 것을 감안한다면 금성대군과는 이미 뜻을 함께 했음을 넉넉히 추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순흥에는 병졸도 많고 또 영남에는 충의지사가 많음을 대군이 예찬하고 있음을 보아, 단종복위 거사계획은 상당히 광역적으로 조직화 되었던 주체세력들이 많았던 것으로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 않다.

그리고 500여 순흥 군사를 동원 이웃 고을을 점령하며, 풍기와 문경 군사를 동원하여 죽령과 조령을 봉쇄하고는 영월의 상왕을 순흥으로 모셔다 왕정을 세우고 영남을 다스리면서 사태가 성숙되면 다시 한양으로 진격하겠다는 그 면밀한 계획은 조선 개국이래로 적장자의 왕위 계승 및 충효를 근간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 시대로 서는 특히 윤리와 강상에 부합되는 것으로 민심의 호응을 얻는 데 적극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는데 사전 밀고에 의하여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라는 그 아쉬움의 역사에는 미련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또 세조의 왕위 찬탈 행위가 혈육인 두 동생을 비롯 충성스런 선비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더구나 한 고을 자체가 역향이 되어 220여 년이 넘도록 수많은 사람들을 질곡으로 몰아넣었다. 조선시대의 형벌은 연좌제로 한 반역자가 생기면 삼족을 벌하는 것은 왕권을 유지시켜 주는 통치정책이었다. 한 사람의 잘못이 친족은 물론 고을 전체가 문제되는 이런 악법은 신분제사회에서는 필요악이었다.

금성대군이 죽은 지도 550여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이곳 주민들에게는 오히려 확고한 신앙처럼 받아들어지고 있을 뿐아니라 해마다 그들의 영혼을 달래는 의식이 금성단(錦城壇)과 두래골 및 곶치재 등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리고 각종 기록의 많은 야사는 물론 한서린 구전이나 전설 또는 민속신앙 등의 형태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이어지고 있어 순흥 사람들의 치열했던 삶을 엿볼 수 있게 한다.
 
4) 순흥의 단종절신 재평가
단종 및 순절자들에 대한 역사적 종합평가는 300여 년 후인 조선 후기 정조조에서 시작하였다. 여러 조정들은 많은 기록자료들을 신중히 오랫동안에 검증했던 결과에 따라 순흥사건을 왜곡과 변질로 점철된 날조기록인 실록보다 야사(서지)와 구전이 오히려 부실하고 어설픈 실록의 기록보다 훨씬 정확하다는 확신에 찼던 것으로 추찰된다.

정조조에 이르러 단종복위사건의 역사적 재평가 과정에서 정조는 장릉에 충신단을 신설하고 금성대군과 화의군의 그와 같은 절의가 종실에서 나왔다는 것이 더욱 특이하고 장하다면서 이보흠 등 직접 32명을 선정하여 배식(配食)토록 한 것이 『정조실록』 15년 2월 21일 조에 있고, 또 순흥부민들에 대한 원한을 채제공(蔡濟恭)이 정조에게 아뢴 기록에 “신은 일찍 영남지방을 왕래한 적이 있어 선비들의 유적을 대략 알고 있습니다. 대군은 순흥에서 화를 입었기에 그 부근 고을에서는 평생동안 세상을 등지고서 북문을 막고 영월을 향하여 동문만 이용하며 원한과 절의를 지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라고 당시 순흥과 이웃고을 백성들의 정황을 전하고 있다.

특히 계유정란과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 ․ 순흥의 정축지변을 통해 사육신 ․ 생육신 ․ 단종절신 등의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순흥의 단종절신으로 금성대군 ․ 이보흠 ․ 서한정 ․ 안순손 ․ 안처강 ․ 안효우 ․ 안이 ․ 허방 ․ 허윤공 ․ 허지 ․ 송계 ․ 송윤창 ․ 송인창 ․ 진흠조 ․ 우원도 ․ 전희철 ․ 정사종 ․ 박심문 ․ 황지헌 등등 많은 절신 중에 거개가 순흥의 금성단 ․ 공주의 동학사 ․ 영월 장릉 및 장릉배식단에 제향되고 있다.

순흥거사 이후 240여 년만인 숙종 24년(1698)에 비로소 단종은 대왕으로 복위되고 묘는 장릉으로 추봉되었다. 그리고 숙종 37년(1711)에 순흥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왕의 윤허를 얻어 순흥에 제단을 설치하게 되었으니, 이가 금성대군과 이보흠 부사 그리고 당시 순절한 이름 없는 모든 충의열사들을 함께 모시게 된 지금의 금성단이다.

그 후 영조 17년(1741)에 경상감사 심성희(沈聖希)가 나라에 주청하여 국비로 사우를 세운 뒤 순흥부에서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해마다 봄․U가을에 제향토록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보흠 부사는 사후 300년이 지난 뒤 영조 14년에 금성대군의 처가곳으로 청안(충북 청원군 북이면 용계리)에 살았던 대군의 10대손 이진수의 진정으로 신원 복권되어 대군은 정민으로 이부사는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동왕 15년(1739)에 시호를 충장으로 내리고, 영천의 송곡서원 및 순흥의 금성단 등에 모시게 하여 높은 충절을 기리고 있다.

또 순흥에는 전설과 구전으로 내려오는 한서린 이야기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것은 경자암(敬字巖)과 제월교(霽月橋)의 설화 ․ 금성대군 혈석을 신체로 모신 서낭당 ․ 금성단의 은행나무 ․ 피끈내 피끈동 등의 이야기며, 단종복위 거사계획 당시 금성대군과 이부사는 곶치재(串峙嶺)를 넘어 마락리를 지나 영월의 상왕을 만났으며, 그때 두 사람이 ‘의’를 세운 곶치재를 건의령(建義嶺)으로 부르고, 단종(태백산신령)과 금성대군(소백산 신령)을 모신 서낭당이 갯마루에 세워져 전해오고 있다. 이곳은 이 지방의 민간신앙의 축을 이루고 있음을 순흥향토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종에 대한 불사이군의 충절은 순흥의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더욱 그 빛을 발하였다. 영남의 선비들이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일찍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단종에 대한 불사이군을 바탕으로 했던 절의정신의 전통을 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안동이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요람이라면 그 요람을 이루게 한 물줄기의 근원은 곧 순흥이라는 것이다. 선비들은 국난 때는 구국의 길에 나서는 데도 주저하지 않음으로써 영남이 한국정신문화 및 선비문화의 메카로 자리잡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이 정축년의 변란은 순흥안씨의 최대 피해사건이다. 수많은 우리 선조들 특히 11~12세 선조들이 관향에 살다가 무참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거나 살육 당하였다. 특히 정사인 왕조실록의 기록에 순흥고을의 선비와 벼슬의 세분 순흥안씨(안순손, 안처강, 안효우)가 있었으니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그리고 남은 순흥안씨는 역적의 집안으로 얼마나 지탄을 받고 홀대를 당했겠는가. 또 다른 순흥안씨로부터 원망을 들었을 것이고 자연히 그 자손들은 숨을 죽이고 외지로 숨어들었을 것이며 후손이 족보에 올리고 싶어도 받아주지도 않았 을 것이리라.

세조에게는 역적일지 모르나 부당하게 쫓겨난 임금을 복위시키려는 사람의 도리를 다했던 사육신처럼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할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고 인륜의 도를 지키려 했던 그 순절을 후손은 오랫동안 기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