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조는 6세 신(愼)이고, 4세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둘째 손자이며, 문순공우사의대부 노부도감판관 (諱 于器)의 차남이다. 벼슬이 우사의대부 노부도감판관에 오르셨다.

판관공파(判官公派)의 역사


1. 판관공파(判官公派)의 유래

판관공파 파조 휘 신(愼)은 고려 충숙왕 때 태어나 공민왕 때 돌아가셨다. 충숙왕 때 유청신, 오잠 등 일부부원배들이 고려를 원나라의 직속령인 성(省)으로 만들려는 이른바 입성 책동이 일어났는데 이제현 등 유신과 국왕의 완강한 반대로 무위로 끝난 것은 매우 다행스런일이었다.

충숙왕이 죽자 앞서 2년 만에 물러난 충혜왕이 다시 복위했다. 그러나 충혜왕은 주색과 사냥을 좋아하여 민심을 잃었고, 원은 그를 원나라로 소환하여 유배하는 도중 에 객사 했다 . 충헤왕이 뒤를 이은것은 충목왕(1344~1348)이었다. 충목왕은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종유, 이제현, 박충좌 등 명망 있는 원로 유신들이 정치를 이끌었다. 특히 충목왕 3년(1347)에 정치도감이라는 특별기구를 설치하여 부원세력을 척결하면서 정국이 요동칠 때였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아들로서 비록 원나라 공주(노국대장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원에서 살다가 원의 후원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고려인의 정체성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왕은 밖으로는 반원정책을 통해 고려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안으로는 백성을 괴롭히는 권문세족을 억압하여 왕권과 민생을 동시에 안정시키는 개혁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순흥안씨 시조인 상호군공(上護軍公) 휘 자미는 영유, 영린, 영화 삼형제를 두었는데 이분들이 순흥안씨 일, 이, 삼파의 파조이고, 각각 추밀공파(樞密公派), 별장공파(別將公派), 교서공파(校書公派)라 일컫는다. 신(愼)은 그중 일파 추밀공 영유의 후예로서 문성공 휘 유(裕)의 손자이고, 휘 우기 문순공 자 허중(虛中) 호 죽옥의 둘째아들이다. 이분이 분파하셨는 바, 우사의대부 노부도감판관(정5품)이란 관직을 갖고 있는 터라 이 후손을 판관공파라 부르게 되었다.

참고로 언급하자면, 노부판관은 왕실의 의장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1298년 고려 충렬왕 24년 출생했고, 배위는 청주군부인 한씨(淸州郡夫人 韓氏)이고 한씨의 부친은 흥복도감판관 홍보이다. 홍보의 조부는 한공연이고 부는 한주 처부는 최극평이다. 벼슬이 노부도감판관에 이르렀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정진하셨고 나라에서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시서와 풍월을 벗삼아 청빈하고 고고한 삶을 살다가 1364년 세상을 떠나셨다. 판전교시사 훈(勳), 예빈윤 정(貞), 주부동지 경(璟) 3형제를 두셨다.

파조 신에 대해선 많은 문헌들이 소실되었고 묘소 또한 실전되었으며 배위 청주 한씨 묘소도 실전된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후손들이 종중과 상의하여 시조위 실묘에 향려단을 창설하고 세사를 모셔온 고례(古禮)에 따라 1922년 순흥 평리촌에 공의 세사단(歲祀壇)을 설단하니 이를 오산단이라 이름하고 매년 시월 삭일에 제사드렸다.

그후 1962년 순흥안씨의 일, 이, 삼파가 합심하여 관향지에 산재하던 향려단(鄕閭壇) 대산단(臺山壇) 산파단(山坡壇) 오산단(梧山壇)을 순흥면 석교리 구추원재로 옮겨 합설하였다. 다시 1995년 시조사단 성역화사업에 의하여 순흥면 읍내리추원단(追遠壇)으로 모신 것이 오늘에 이른다.

순흥안씨 세보에는 공의 행적과 오산단 비문들이 등재되어 있지 않다. 기록이 부실한 이유는 순흥안씨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정축변란에 연루되어 순흥관향지에 주로 세거하던 판관공파, 서파공파 자손들이 거의 멸문지화를 당했기 때문이다.

정축변란이란 간단히 설명하자면 순흥으로 귀양간 세종대왕의 6자 금성대군이 수양대군(세조)에 맞서 단종의 복권을 시도하다가 밀고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이에 연루되어 순흥 일대에서 유력한 가문으로 존재하던 순흥안씨가 심한 피해를 본 사건이다. 정축변란 이후 100여 년 동안 순흥안씨는 관향지인 순흥에 드나들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해 순흥에 있었다는 시조공의 묘소를 비롯하여 12분의 선조 묘소가 모두 실전하는 계기가 되어버렸고 기록마저 멸실되었다.

앞으로 서술하게 될 판관공파 11세까지의 기록이 간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순흥의 관향지가 공식적으로 복원된 것은 숙종 계해년(1683년)에 이르러서이다.


판관공파의 상대(上代)


1. 서산종중의 입향

파조 판관공 신은 3자를 두었으나 장자 판전교사사 훈은 후손이 없고 둘째 정(7세)은 지금의 서산종중의 큰댁이 되고, 셋째 경이 지금의 안동 가구종중으로 이어진다.

정의 장자 찬성사(贊成事) 익(益)은 후손이 없고, 차자 우세(遇世?세)는 서산종중의 입향조가 된다. 공의 사적은한 때 실전되었으나 후손의 지극한 원념의 힘으로 현몽한 지석이 발견됨으로 묘와 비석을 찾고 복원하게 되었다.

1483년 8월 박신(朴信)이 간행한 묘지석 기록에 의하면 우세의 자는 보희(輔熙), 호는 후죽계(後竹溪) 또는 어초은(漁樵隱)이다. 고려말 충혜왕 3년 9월에 송도에서 나고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리사에 이르고 한성판윤이었다. 이조에선 정사정란 3등공신으로 원종공신이 되었다. 사후 승록대부 의정부좌찬성 행 호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고려말 일본에 인질로 잡혀 계시다 친우 정몽주에 의해 귀환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문원(文元)이란 시호를 받았다.

공의 자 보해는 간성군수를 지냈고, 장손 철석은 진사로 서산 사항종중의 큰집이 되고, 둘째 은석은 진사로 서산문현종중의 큰집이 되었다.

2. 안견
여기 특이한 인물이 있으니 보해공의 3자로, 보해공의 후배(後配) 소생 다섯 분가운데 한 분 견(堅)이다. 자는 가도이고, 호는 현동자, 어릴적 아명은 득수이며, 서산본읍 지곡인이라 했으니 지금의 지곡면 산성리 출신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안평대군의 초상화를 비롯해 이사마산수도, 팔준도, 몽유도원도, 대소가의장도 등이 있다.

안견화풍이라고도 하는 그의 화풍은 특히 산수화에서 북송대의 곽희파와 남송대의 마하파 등 다양한 화풍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조선적인 화풍을 완성한 것이다. 경물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구도상의 특색을 비롯하여 공간 개념과 필법 등에서 조선적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화풍은 조선전기 및 중기의 조선 화단은 물론 일본 무로마치시대의 수묵산수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447년에 그린 몽유도원도가 그의 유일한 진작으로 전한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조선 전기 세종 29년(1447)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꿈에서 본 도원경을 안견이 그린 그림으로 소재는 비단에 담채이며, 크기는 그림 부분이 38.7×106.2㎝이다. 안평대군이 발문을 쓰고, 박팽년 ? 정인지 ? 성삼문 ? 신숙주 등 20여 명의 문인들이 찬문을 지었다.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화면의 구성이 전개되고 있는데 왼편의 현실세계에서 점차적으로 오른편 상단에 위치한 환상적인 도원으로 접근해가면서 현실세계와 도원세계가 시각적으로 큰 대조를 보인다. 중국 이곽파 화풍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동시에 안견의 독자적 화풍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후 한국의 산수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 일본의 국보로서 덴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그 사본이 서산 안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조선전기 독자적인 화풍을 완성한 안견은 세종 연간에 도화원 화원으로 종6품인 선화(善畵)를 거쳐 정4품인 호군에 이르렀는데 안평대군의 후원을 받으며 활동하였다. 조선시대 화공은 종6품 이상을 올라가지 못하는 관례를 깬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몽유도원도 이외에도 국립박물관에 적벽도 사시팔경도 등이 소장되어 있다. 안견이 서산 출신인 관계로 서산에 안견기념관이 있고, 매년 다양한 기념활동들이 전개되고 있고 후손 대표로 서산종중이 참여하고 있다.

3. 서산종중의 발전
ㅇ. 문원공(文元公) 휘 우세(諱 遇世) 전기(傳記)

ㆍ1342년 9월 일 고려의 서을 개성에서 탄생.
ㆍ1351~1371 고려 공민왕 재위시 문과(文科) 급제
ㆍ고려조 지제교(知製敎: 교서 및 칙서담당), 판전리사(判典理司: 정2품) 역임.
ㆍ1378년(37세) 고려 우왕 3년에 일본 사신으로 갔다가 포로로 되었다가 환국.
ㆍ1392년(51세) 조선 개국후에는 태조, 정종, 태종 3대 임금을 섬김. 태조로부터 원종공신(原從功臣) 대호군(大護軍) 받음.
ㆍ1402년(태종 2년) 별시위로서 역모사건 탐지 왕에게 직보.
ㆍ1404년 정난공신(靖難功臣: 난리를 평정한 공신) 받음.
ㆍ1406년 농지 30결과 노비 하사 받음. 상호군(정2품)과 한성부윤(현 서울시장) 역임
ㆍ1423년(세종 5년) 자손까지 공신록에 등재케 함.
ㆍ1427년(세종 9년) 2월 7일 서거.
ㆍ1439년(세종 21년) 묘지석 묻음(묘지 문헌 참조)
ㆍ1463년(세조 9년) 승록대북 의정부 좌찬성 행 호조판서로 추증.

호는 후죽계요, 관직은 호조판서를 역임하셨다. 공은 고려 말엽에 벼슬을 하여 일찍이 「지제교(왕의 칙서, 교서 등을 작성하는 벼슬)」를 역임하셨다. 사신으로 명을 받아 일본에 가셨는데 거기에서 포로로 잡히셨다. 포은 정몽주 선생이 금품을 가지고 가서 교섭하여 환국하시게 되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벼슬이 1품까지 오르고 돌아가셨다.

묘는 서산시 지곡면 옛성터 아래 갈마동 유좌에 모셔졌으며 그 신도비에 「임금이 전민(田民)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릍 혐오하는 자들에 의해 도괴당한 바 되었다. 일찍이 금교 한성부윤(지금의 서을시장) 재직시에 왕명으로 하사한 노비 문서가 있으며 자세한 행적은 현감륵 및 청야집에 기재되어 있다. 세사는 음력 10월 7일이다. 배위는 서원 군부인 염씨이다.

문원공의 후예 선산문중은 11세 경조 이후 지속적으로 진사 참봉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어지러웠던 탓에 많은 기록들이 산실되어 자세한 사적은 미비하다. 아마도 금성대군과 단종복위사건으로 관향지 순흥이 쑥대밭이 되었을 때 그 영향이 서산까지 미쳐 주옥같은 자료들이 소실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① 영(寧-2세) 진사이다.
② 언호(彦毫-3세), 광수(光壽?4세) 진사이다.
③ 국인(國仁-5세) 자 충경, 호 만취정 지극한 효성으로 94세에 졸하고 가정대부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④ 극(極-6세)은 무과 진사로 병절교위 겸 용양위부사과사복판관 절충장군이고, 아들 복형은 효행으로 헌능참봉이 되었다.
⑤ 후정(后靜-9세) 통정 승정원 좌승지 경연참찬관이고 그 아랫대 여석(如石)은 가선 호조참판 의금부사를 증직받았다.

(8) 헌(櫶-17세) 자 헌지, 경엄의 자, 통정대부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9) 식(植-17세) 자 치백(稚伯). 경택의 아들이고, 승사랑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판관공파의 상대(上代)

1. 안동 가구종중의 입향 이전의 사적
(1) 의려(義輿?10세) 선조와 자금어대(紫金魚袋)
고려 공양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현개성시장(開城少君)을 역임하면서 공양왕으로 부터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자금어대란 국가에 최고로 공헌하고 특별한 공적이 있을 때만 하사하는 것으로 세금?I노역 기타 면책특권을 받는다. 자금어대란 황궁에 드나들 수 있는 포상물로 물고기 모양의 온각을 말하며 거기에 관등성명을 새겨 놓았다.

자금어대의 시원은 당나라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금어대를 받은 사람은 신라시대 884년 26세때 동양최초의 문현인 최치원이 당나라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우리나라도 바로 이때 도입되었다.

자금어대를 소지한 사람은 언제나 검색없이 황궁을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 부인은 숙인 양천 허씨이다. 父는 지(祉), 祖父는 허(霮)이시다.

앞서 기술한 대로 환란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안동의 가구에 입향하는 선손 이전의 조상들의 흔적과 기록은 산실되어 고증하기 매우 어렵다. 이에 7세부터 11세까지는 다음 몇 줄의 기사로 대체하다 보니 후손의 한사람으로서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마저 안명원 가보와같은 기록에서야 찾을 수 있다.

① 경(璟-세) 문주부 동정(文主簿 同正) 안명원 가보에는 랑장(郎將) 부인은 나주임씨이다.
② 허(詡-세) 검교군기감을 지냈다. 총랑
③ 지(祉-세) 중현대부 종부령으로 치사. 부인은 월성군부인 이씨이다.
④ 길상(吉祥-1세) 승사랑도염령동정에 이르렀다.

2. 안동 가구종중의 입향과 발전
선손에 이르러 와룡면 가구리에 정착한 판관공파 가구 종중은 그 숫자는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500년 넘는 세월을 가구에 세거하면서 충의와 효행의 인물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전통에 따라 학식과 덕망이 높아도 초야에 묻혀 은거한 이들은 다 제외하고, 벼슬에 뜻을 두고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선손(善孫-12세, 1422-491) 사마록 장사랑에 올라 행의정부녹사를 지냈다. 안동권씨인 권구서(정5품)의 사위가 되면서 처가마을인 와룡면 가구리에 정착하였다. 이후 안동 와룡면 가구리는 판관공파 후손들의 주요 세거지가 된다.
(2) 처정(處貞-13세) 선손의 동생인 계손의 아들이다. 군기시첨정 승사랑 울진훈도이다.
(3) 수(琇-14세) 당대의 최고 권력자이며 실세였던, 윤임, 윤원형, 김안로를 탄핵 상소하였던 기골있는 선비였다. 퇴계선생도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자는 근부, 호는 이산, 회헌 안향의 10대손이며, 승사랑 처정의 아들로 1489년(성종 20)에 태어났다. 사마시에 합격, 1525년(중종 20) 예과에 급제 동27년 전적을 거쳐 호조좌랑, 1535년(성종 30) 호조정랑을 거쳐 충청도사로 이듬해 명나라 사신 공용경, 오희맹을 맞이하여 함께 평양에서 수창하기도 했다. 동32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있으면서 김안로의 전권을 탄핵하다가 체직되어 영월군수로 밀려나고 동37년 황해도 진휼사를 거쳐 이듬해 고성군수에부임하여 어진 다스림으로 칭송이 있었다.

중종이 재위 39년으로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매 그 외숙 윤임이 득세하여(윤임은 학행있는 명사들을 많이 등용하였음) 외척이 교횡할 조짐을 경계해야 한다는 상소로 윤임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겨우 8개월 만에 승하하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매 그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니 명종의 외숙(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이득세하여 조정은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두 파로 갈려 심한 반목으로 정국이 동요칠 때 그는 뜻이 통하는 동료에게 이르기를 “조정은 두 척신의 각축장이 된 판이니 조신들은 이 편에 붙지 않으면 저 편에 붙어야 견디어 낼 형편인데 우리야 차마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고 어느 날 경연에서 윤원형을 면척하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1545) 독서와 후진양성으로 여년을 자적했다.

당대의 권력 실세들과 맞서 싸웠던 안수의 기골과 기개 있는 선비정신을 안복준이 영향을 받았음을 그가 영조?I정조 임금에게 올렸던 당찬 상소문들의 내용을살펴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4) 제(霽-15세) 자는 여지, 호는 동고, 수의 아들로 1528년(중종 23) 안동 가구에서 태어나서 1602년(선조 35)에 사망하였다. 1561년(명종 16) 사마양시에 합격했으며 1590년(선조 13)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학유, 학록, 학정, 박사를 거쳐 1590년(선조 23) 사헌부감찰, 형조좌랑을 지내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왜적이 짓밟은 영남의 낙동강전선이 무너져 가장 참혹한 전화를 입게 되었는데 안동부사도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 군사를 지휘하고 30명을 뽑아 의병대를 조직하여 향토를 지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1593년(선조 26) 용궁현감에 부임하였을 때 고을이 온통 처절한 전화로 폐허가 된 지경이었는데 그는 정성껏 백성을 돌보아 안주하게 했다. 그후 도학을 닦기 위하여 권춘란과 함께 도산(陶山)을 찾으니 퇴계가 “그대들의 문과 행은 내가 이미 들은 지 오래인데…… ”라고 했을 정도로 문장에 능했다.

임진왜란에 이바지한 공로로 원종훈에 책록되어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예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안동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안동을 사수한 안수의 국가관이나 군대를 잘다스리고, 이용하여야 나라의 안위가 걱정 없고 백성이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안복준의 병제관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안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보여 진다.

(5) 담(霮-15세) 자는 여숙, 수의 아들이고 군자감첨정을 지냈으며 부호군에 오르고 뒤에 예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공께서는 1543년 생으로 한 살 차이인 1542년생의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1501년생) 학풍의 중흥에 크게 기여하였고, 임진왜란 때 형님 되시는 안제(동고공)와 함께 의병활동을 눈부시게 하여 영남 일대피해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를 했다.

(6) 경택(景澤-16세) 증 자헌대부 예조판서.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문인(門人).

(7) 경엄(景淹-16세) 승의랑, 가구문중을 크게 융성케 하였다. 문집으로 『승의랑공일고』가 남아있다.

(8) 헌(櫶-17세) 자 헌지, 경엄의 자, 통정대부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9) 식(植-17세) 자 치백(稚伯). 경택의 아들이고, 승사랑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판관공파의 빛나는 후손들

1. 영남유림의 중심으로 성장인물
가구문중은 대략 17세기 이후로는 비교적 안정적인 기반 위에 영남 유림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1) 중현(重鉉-18세, 1639-1685)
자는 사정, 호는 사영재, 정릉참봉 호조참판을 증직받았다. 1662년(임인) 증광시 진사 3등 40위로 합격하였다. 1659년 기해예송의 실정을 글월로 지어 그 괴로움을 밝혔다. 귀석, 연석, 노석, 우석 형제를 두었고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2) 귀석(龜石-19세, 1659- ?)
자는 수백, 호는 율포 1693년 계유식년시 생원 3등 13위로 급제했다.
문집으로 『율포일고(栗圃逸稿)』를 남겼다.

(3) 연석(鍊石-19세)
안택준과 안복준의 선친이다. 자는 보천, 호는 보만당 또는 북계공이며 참봉 중현의 둘째 아들로 1662년(현종 3) 안동 가구에서 태어나 1731년(영조 7)에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인동 장씨로 공조 정랑의 딸이다.

사당이 못이 되면서 용이 그 가운데 누운 꿈을 얻고 낳았다는 그는 11세에 취학하여 첫 해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다 배웠을 만큼 총명했으며 20세 때 숙종 9년(1683)에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그로부터 20년 뒤인 숙종 30년(1704) 겨울 증광전시 갑과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라고 1983년 발간 『안동향토지』에 실려있다. 문장에 능하여 젊은 나이에 생원진사에 뽑혔다. 과거에 합격하자 종부시직장에 임명되어 전적에 옮겼다. 형조좌랑, 연일현감, 부안현감, 결성현감, 양산군수, 춘추관, 특히 경연관에 임명되어 폐정의 시정과 구민책을 건의하여 국가정책으로 실시하도록 하였으며 후일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안연석은 결성현감에 부임하여 군사명부를 새로 만들었다. 근본적으로 병역을 기피한 자와 연령을 조작한 자, 뇌물을 주고 병역을 면제받은 자, 권력의 비호를 받은 자를 단호히 색출 처벌하였다. 엄격하고 서슬이 시퍼런 군정의 폐정을 시정하면서 자신의 봉급을 내어놓고 쌀 수백 석을 조달하여 고마청을 설치하여 극빈자의 생활대책을 세워주기도 하였다.

유교정치는 덕치?인정을 근본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한다. 유교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왕과 신하가 유교에 깊이 흠취되는 것이 우선 조건이고 왕도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체계의 마련이 필수조건이 된다.

다시 말하면 유교로 흠취된 국왕과 유신들이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할 수 있는 정치체제 하에서 유교적 민본사상에 근거한 덕치?I인정을 베풀고 나라의 모든 의리는 예치에 입각하여 오례(길례?가례?I빈례?군례?I흉례), 사례(관?I혼?상?I제)에 따라 행하며 유교 윤리가 사서(士庶) 모두에게 생활화되는 이상적인 정치가 베풀어진 시대로 흠모하였으나 완전한 유교정치란 이상이지 실현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안연석도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정치의 소유자였다.

정파가 다르다 하여 경상감사 권○○이 율곡과 우계(성혼)의 성명을 마구 부르는 것을 보고 크게 꾸짖었고, 경주부윤에게 경주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영당을 헐어버리라고 지시하자 외손 된 처지로서 꼭 그렇게 해야만 되느냐고 심한 질책을 하였다고 안동 향토지는 기술하고 있다. 당시 영남사람들의 절대적인 여론은 이이, 성혼을 문묘에 배향할 수 없는 여론임에도 불구하고 안연석은 같은 영남사람이지만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찬성하고 나섰다. 평소의 소신은 여론과 관계없이 반대할 것은 분명히 반대하고 찬성할 것은 분명히 찬성하는 정치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4) 노석(老石-19세, 1665- ? )
자는 성경, 호는 한송헌. 연석의 동생이며 1683년 계해 증광시 생원 2등 13위에 급제했다. 배움이 높아 영남 유림에 의해 영남의리의 종주라 불리웠다. 문집으로 『한송헌일고(寒松軒逸稿)』를 남겼다.

(5) 우석(禹石-19세)
자 주경, 호는 반계(蚌溪). 통덕랑 4형제분의 막내이고 학문이 높았음에도 조부와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한다. 특이한 점으로는 방계공의 후손들이 흩어진 묘소를 한데 모아 영모원을 건설하고 이후 약40여 기에 이르는 제선조를 모셨으니 이는 대한민국의 묘제에 있어서도 선구적인 모범 사례로꼽히는 일이다.(사진 영모원)

(6) 낙준(洛駿-20세, 1696-1772)
호는 남창. 하당 권두인의 문인으로서 질문에 요지가 정확하여 총명함으로 유명하였다. 후에 풍기에서 선비들을 창도하며 심경을 강의하였고 문집으로는 『남창일고』를 남겼다.

(7) 택준(宅駿)
1689년(숙종 15)에 태어나 1756년(영조32)에 사망한 영남 유림으로 중앙정부를 움직인 유일한 인물이다. 이 시기 탕평정치를 이끈 주체세력은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였다. 안택준은 노론이고, 박문수는 소론이라는 점에 유의하여 본다. 안택준은 대체적으로 행동이 준엄하고 과격한 준론에 속하였다. 이때 박문수는 소론 중에서도 겉은 강한 준론파였지만 내용은 시파였기 때문이다. 이들 정파간의 이합집산은 대단히 복잡하였고 붕당의 범위를 넘나든 사람이 많았다. 선친 안연석도 노론 강경파로서 정미환국 때 물러났으니 가풍 또한 이기지 못한 것 같다. 안택준은 영남 일대 특히 향촌사회에서 사림의 중심인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 당시 서원을 통해서 향권을 쥐고 중앙정치에 영향력을 끼쳤다. 병조판서 박문수가 영조임금에게 간언하여 안택준이 추진하는 문정공 김상헌을 기리는 서원 설립을 막으려고 했을 정도면 그 당시 안택준의 영향력과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안택준은 사림세력의 교두보를 확보하여 향권을 장악해서 중앙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이 지역에 별도의 원우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박문수의 반발에 의해 결실을 보지 못했다.

특이한 부분은 안택준 안동 겸관 심정기를 통하여 김몽렴, 김경헌, 황우청, 유정화를 형벌했고, 전 감사 윤영래를 옥에 가두고 다스렸다는 사실이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영조임금이 직접 안택준의 소장을 반려했다는 것이다. 앞서도 말하였지만 무관인 안택준이 누구의 힘을 믿고 법치에 어긋난행동을 하고도 오히려 권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는지 의아스러운 부분이다.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보아 안택준을 따르는 세력들이 무리를 이루어 중앙경계에 압박을 가했다. 박문수와 안택준의 치열한 싸움은 이미 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이미 당파간의 즉 노론과 소론의 싸움으로 변질된 것이다.

17세기 후반의 정국에서는 붕당 사이의 격심한 갈등이 정치부재의 현실을 초래하여 결국 왕도정치를 붕괴시켰던 것이다. 박문수와 안택준의 싸움도 결국은 붕당과 탕평의 부산물이며 대리전을 치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박문수에 의하여 철저히 탄압당하는 바람에 당시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동생 안복준에 의하여 40여년 후 정조 원년에 서간사(1785 김상헌)로 사액되었다고 1999년 발간된 안동시사편찬위원회 『안동시사』 1권 225쪽에 기록되고 있다.

김상헌은 한양에서 출생하였지만 대부분의 생활과 정치활동을 안동에서 하였고, 안택준과 같은 정파인 서인의 영수였기 때문에 안택준은 김상헌을 존경했다.

(8) 양섭(養攝-23세)
자 맹섭, 호 용은, 정조 병오생. 학문이 높고 효행이 지극하여 영남 유림의 추천으로 통훈대부호조좌랑으로 추증되었다.(사진) 그 외에도 용은 가선대부 호조좌랑에, 양삼은 노전가선대부에, 석신은 절충장군 겸 용호위부호군에, 교락은 통정대부에, 교덕은 가선대부호조참판에, 교현은 가선대부 호조참판으로 각각 증직되었다.

영양나방 쪽의 우는 통훈대부사복사정이 되고 공의 자손 사대가 각각 증직되었으니 양수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석형은 가선대부 호조참판, 일제는 가선대부 중추부사이고, 석정은 노전가선대부에 각각 증직되었다.

청송의 계현(繼賢)은 통정대부 절충장군 용호위부호군이 되었고 영양의 신원 명현(明玄)은 성균관진사로 안의현감을 지냈고 증 병조판서를 받았다. 명현의 자 완규(完奎)는 진사이고 손자 영양(永養)은 통덕랑이다. 태준(泰峻)은 통정대부이다.

김제 용지(龍池의 국보(國寶)는 통정대부가 되고 그의 아들 희(曦)도 통정대부이다. 영용(永龍)은 가선동지중추이고 이석(以錫)은 통정대부 명(明)은 통정대부 이원(以源)은 가선대부로 그의 아들 영성(永成) 역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전북 부안 평교의 양석(亮錫)은 통정비서이고 영호(令鎬)는 효릉참봉이고 봉호(鳳鎬)는 노전 통정대부 민호(玟鎬)는 가선대부 명당리의 동호(東鎬)는 연릉참봉이고 효행으로 목사가 되고 고종 병오년에 특명으로 비각을 세웠다.

경북 의성의 종필(鍾弼)은 통정대부이고 그의 손자 상현(相現)은 통훈대부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태순(泰淳)은 통정대부이고 그의 아들 상인(相仁)도 통정대부가 되었다. 또 승귀(承貴)는 통훈대부이고 경호(鏡鎬)는 노전 통훈대부이다.

신평(新坪)의 병호(秉鎬)는 승훈랑이 되었고 동생 영호(榮鎬)는 노전가선대부 내부협판겸 평의원이 되었다. 또 덕인의 승중(承仲)은 숭릉참봉을 지냈다.

인동(仁同)의 석룡(碩龍)은 성균관진사로 박사가 되었다. 그의 아들 상례(尙禮)는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아들 해발(海發)은 무과 진력부위(武科振力副尉)로 그의 아들 순선(順善)은 영동정(令同正)으로 통정대부에 증직되었다.

수량(遂良)은 승훈랑이요 그의 아들 몽설(夢說)은 의금부첨지중추부사겸 오위도총부총관이 되고 그의 아들 욱(昱)은 장릉참봉이요 욱의 아들 세호(世好)는 통정대부중추부사가 되었다.

유(楡)는 문과급제로 영해부사를 거쳐 통정대부로 증직되었다. 그 아들 이현(履鉉)은 수문장이었고 손자 난석(蘭石)은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종손 충준(忠駿)은 문과급제로 첨추부사가 되었다.

같은 집안의 두현(斗鉉)은 통덕랑이 되었고 그의 아들 강석(崗石)은 형조좌랑에 추증되고 아우인 청석(淸石)은 공조좌랑에 증직되었다.

주(柱)는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증직되고 그의 아들 기현(基鉉)은 노전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가 증직되었다.

경윤(景潤)은 통덕랑이요 그의 손자 의현(義鉉)은 통정대부 증손 양석(良石)도 통정대부가 증직되었다.

경택(景澤)은 예조판서에 증직되고 그의 아들 식(植)은 승사당 자헌대부지중추부사(承仕郞資憲大夫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선준(善駿)은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가 증직되었다.

서산 덕송의 교인(敎仁)은 첨지증가선중추부사이고 당진의 재덕(載德)은 참봉이다.

안동 가구(佳邱) 명우(明遇)의 차남 녕(寗)은 호를 모헌(慕軒)이라 하고 독행효우(篤行孝友)라 하였으며 부모가 병약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밤낮으로 시탕(侍湯)하고 혈지(血旨)로 이변을 일으켰으며 손 양섭(養攝)은 통훈대부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9) 행준(行準-24세)
자는 이형, 호는 만유재, 문집에 『만유재집』이 있다. 184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사도세자를 기리는 만인소에 참가하였다.

(10) 택호(宅鎬-26세, 1860-1918)
성거(聖居), 호 우산(尤山) 송병준의 문인으로 문집으로 우산집을 남겼다.

(11) 세천당 비문(世阡堂 碑文)
세천당 위치: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 노곡(蘆谷) 단등양지(短嶝陽地)

2. 온누리에 떨친 효행인물
(1) 효행의 표본 만흥
만흥(萬興-8세, 1659-? )에게는 동화와 같은 사적이 전해온다. 묘갈명에 의하면, 평소 성품들이 온순하고 덕행이 지고했으며 특히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였다 한다. 부 휘 복형께서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정성을 다해 간병했으나 듣지 않자 죽순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는 한겨울이라 죽순이 없을 때지만 대밭에 항아리를 엎어놓고 기도하니 다음날 그 자리에 죽순이 그득하였다 한다. 이 죽순으로 부친이 완쾌되었다.

5년 후 부친이 또 위독하였는데 만약이 무효라 고심하던 중 잉어가 특효인 것을 알고 한 겨울철에 강변에 나가 통곡하니 얼음이 갈라지고 잉어가 튀어나와 이를 부친께 대접하니 역시 완쾌하였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마을에선 효자문을 세웠고 이후 조정에서 이를 알고 순조 24년(1824)에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 증 가선대부호조참판 겸 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사복사정의 직함을 하사받았다.

사실 만흥의 사적을 그대로 믿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지만 그 만큼 성품이 돈독하고 효행이 깊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례라 볼 수 있겠다. 가구문중에서도 효성이 지극하여 유명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필중(弼重?5세)이다. 자는 은보 호는 두암이고 선공감가감역을 지냈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이원걸이 집필한 『교남지』에 실렸다. 부모 양상에 5년동안 소식을 하였다 한다. 이외에도 효성의 지극함으로 묘비에 올라 있는 이 부지기수이나 여기에 다 일일이 열거하지는 못하였다.

3. 조국의 광복을 위한 투쟁인물
순흥 안가의 지적 전통을 살펴보면 많은 지식을 쌓고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안빈낙도하며 도학에 힘쓰다가도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분연히 일어나 활동하곤 하였다. 국권을 상실한 일제 강점기 또한 그 예외가 아니었으니 수많은 인물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특이한 점은 이분들 대부분이 사회주의 계열인 것이고 이런 사실이 혹자의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나 이는 당시 시대적 분위기 자체가 지금과 많이 달라 사회주의 운동 자체가 일제에 항거하는 주요한 방편이었고 정부도 과거와는 다르게 이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는 추세이다.

(1) 찬중(燦重-25세, 1860-1930)
자는 순화, 호는 율포. 와룡 중가구리 출신. 교남교육회 교육구국운동 1908년 교남교육회에 참가하던 찬중은 재정난으로 폐교 직전에 있던 동양학교를 김영갑 이직열과 함께 재건하는 등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힘썼다.

(2) 승국(承國-27세, 1869- ? )
이명은 안래국.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 출신. 상길, 상훈의 아버지. 박상진, 채기중 등에 의해 조직된 대한광복회에 군자금을 100원을 지원하였다. (독립유공자공훈록의열투쟁기록 참고)

(3) 상길(相吉-28세, 1892-1958)
자는 한유.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 출신.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경상북도 교통부장, 귀국하여 군자금 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1921년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신간회 안동지회 간사 역임. 각종 사상단체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전 조선농민총동맹중앙집행위원)에 종사했으며 1927년 조선공산당 경북도책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에 검거되어 1930년 징역 4년 6월을 선고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4) 상훈(相勳-28세, 1898- ? )
자는 응방, 호는 회산.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 출신. 상길의 동생이며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가입 안동청년지회에서 활동하였고,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역자 공산대학 1회 졸업생으로 그 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하다가 1929년 일제에검거되어 징역 5년을 복역하였다.

(5) 상태(相泰-28세, 1901-1972)(이명 相敬)
자는 성가, 호는 백파, 이명(異名) 상경(相敬).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 출신. 1927년 신간회 활동을 하였고, 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1930년 일제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10월 복역하였다. 2005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묘: 국립대전 현충원제3애국지사 묘역 제628호.

(6) 병극(柄極-28세, 1853-1965)
자는 성노,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 출신. 3.1 운동시 예안면 봉기를 주도하였다. 징역 3년을 선고받고 2심에서 징역 1년 6월 확정되어 복역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묘: 국립대전 현충원 제4애국지사 묘역 제40호.

(7) 상윤(相潤-28세, 1911-1949)
자는 경신,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 출신. 1931년 안동콤그룹을 결성하였다.

이후 농민운동 재건에 노력하고, 1933년 5월 노동절기념 집회를 모의하다가 일제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3년 6월 선고받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