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조는 9세 종례(從禮)로서 4세인 문성공(文成公 諱 珦)의 5대손이며, 경질공(諱 瑗)의 차남이다. 감찰공은 고려 공민왕 8년(1359)에 출생하셔서, 공양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이사 및 양주목사를 역임하셨다. 태조와 태종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서원에서 은거하다가 세종 11년(1429) 향년 71세로 타계하셨다.

감찰공파(監察公派)의 역사

1) 감찰공파의 유래
공은 시조공의 8세 되는 경질공(景質公) 원(瑗)의 차남으로서 고려 공민왕 기해년(1359)에 출생하셨다. 공양왕 기사년(1389)에 문과에 급제하시고 사헌부 감찰어사(司憲府監察御使) 및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역임하셨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수차에 부름에도 부임하지 않고 서원(瑞原)에서 은거하시다가, 세종 기유년(1429)에 향년 71세로 돌아가셨다.

배위는 정부인 연안김씨(延安金氏)이며 슬하에 직장(直長) 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치(緇),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 신(信),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말생(末生) 4형제와 5녀를 두셨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郡) 진건면(眞乾面) 양지리(陽地里)에 있는 천마산(天摩山) 능곡 뒤 산기슭에 손좌(巽坐)에 합장이라고 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고 있다가 후손들이 수년에 걸쳐 십여 차례 현지답사와 고보(古譜)에 의한 묘지 약도와 또 여러 고증에 의해 그 묘소를 확인하여, 1966년 병오(丙午) 3월 청명절(淸明節)에 묘역을 개수 봉영(改修封塋)하고, 그 해 시월 4일 19대손 재호(在祜)가 상석(床石) 및 묘비를 세우고 시월 5일에 세사를 봉행하여 왔다.

공의 묘소는 그 묘역이 중년에 후손들의 영체(零替)함과 불찰로 타인의 소유가 되었으며 산로(山路)가 험준하여 세향(歲享) 때마다 어려움이 많았을 뿐 아니라, 후손으로서 파조(派祖) 님을 외로운 곳에 봉안하여 너무나 송구한 감이 없지 않아 이장(移葬) 문제를 논의하던 중, 1989년 6월 17일 감찰공파종회 임시총회에서 이장키로 결의하고 1989년 시월 3일 순흥안씨 세장지지(世葬之地)인 충남 당진군(唐津郡) 송악면(松嶽面) 반촌리(盤村里) 선적동(善積洞) 국사봉(國士峰) 하록(下麓) 간좌(艮坐)에 합폄(合?으로 이장하여 석물을 갖추어 단장하였다.

동 묘역 일원(一圓)은 소절공(昭節公) 휘 치화(致和)의 사패지(賜牌地)이며, 기지시리(機池市里) 소절공 묘소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곳에, 감찰공의 증손 봉사공(奉事公) 휘 관(琯) 및 현손 이조판서공(吏曹判書公) 휘 호의(好義)의 묘소 위쪽에 안장하였으며, 세사(歲祀)는 매년 음력 시월 6일에 봉행하기로 변경하였다.


2) 감찰공 묘소 추심경로 약기
(1) 논산군 벌곡면 신양리 거주 안정순씨(당년, 81세 노인으로서 종사에 일생을 노력하신 분)가 서울 자제집에 다니러 가시어 탑골공원에 구경가시었다가, 조도원씨라는 노인(당년 83세의 노인으로 양주군 진건면 양지리서 누대(累代) 살다가 서울로 이사하여 한약방을 경영하시는 분)과 수인사함으로서 양주에서 오래 사시고 그 친족이 지금도 많이 산다는 말을 듣고 일구월심염두(日久月深念頭)에 떠나지않는 감찰공 산소 실전(失傳)됨을 말하게 되니, 조노인 말에 양주 새능골에 약 60년전에 황해도 사는 안씨들이 감찰공산소라고 두 사람씩 다니며 세사(歲祀)를 지내더니, 근래에는 묵는다고 하며 그 감찰공이 아니신가 모르겠다고 하기로, 그 주소를 적어가지고 음 8월에 보소(譜所)에 와서 전언하였다.

(2) 논산군 논산읍 지산동 거주 안종태가 정순씨의 전언(傳言)으로 주소를 기입하고 음 9월 12일 서울 창천동 문성공부조묘기제(文成公不?=廟忌祭)에 참사(參祀)한 후, 양주군 진건면 양지리를 찾아가서 서울서 만난 조도원씨의 백씨 되는 노인(당년 93세)을 찾아가서 감찰공 산소를 문의하니, 그 노인 말에 자기는 이농(耳聾)하여 상담하기 곤란하니 산주 안악준씨를 찾아서 문의하라고 하기에, 안악준씨(3파 문정공 25세손 당년 79세)를 찾아가서 문의하니, 안악준씨 말에 자기 십여 세시에, 황해도 배천 사는 안씨들이 1파 감찰공 산소라고 매년 세사(歲祀) 지내러 다니는 것을 보았는데, 수년을 오지 않으니 자기 삼종 되는 안상백이가 그 위토 삼두락을 경작하여 제수(祭需)를 차리다가 본손의 왕래가 두절됨을 계기로 팔아먹고 궐사하게 되니, 집안어른들께서 아무리 방조 산소라도 궐사하게 만들었으니 고약한 놈이라고 나무래며, 자기 16대조 형조참판공(刑曹?=判公) (세종대왕 제사자 임영대군 서) 세사 후 퇴물로 약설향의하여 몇해 지내다가 끝내 본손이 왕래하지 않음으로, 지금은 묵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왔다.

(3) 음 10월 7일 당진 판서공 세사 시에 이 말이 논의되었는데, 안악준씨 말에 1파집 감찰공산소라 하면 연대적이나 모든 것으로 보아서 우리 선조의 묘소가 확실하니 가서 보자는 결의 끝에 좌기 인이 갔다. 안종각(安鍾珏), 종태(鍾泰), 종창(鍾昌), 명호(明濩), 두순(斗淳), 성호(星濩) 6인이 양주에 가서 안악준씨를 찾아서 물으니, 종태의 전언과 틀림이 없고 산소는 자기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하여 모르니, 산직이로 2대째있던 이무교(李武釗)에게 물어보자고 하여 병환중(病患中)의 노인이 동행하여 이무교를 찾아가서 물으니, 자기가 안다고 하였다.

(4) 이무교가 말하되 자기 7, 8세 때에 그 부친 철근이가 산직이로서 수호할 때 배천 사는 안씨의 선조 감찰공 산소라고 시제지내는 것을 보았고, 그 위토가 없어진 후 궐사됨으로, 자기네 2대가 수호하던 산소가 묵어서 항상 유감스러웠으며, 그 자손이 나타나기를 심중으로 축원하였다고 한다.

(5) 산소에 배성(拜省)한 후 그 주위를 살펴보니, 송목이 무성하므로 그 즉시에 벌안을 모두 벌목하고 내려오면서 수호하던 산소를 모두 물으니, 그 이하에도 5, 6위가 계시나 어느 분의 묘소인지 알 수 없었다.

(6)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보니, 농부들 말에 배천 사는 안씨의 선조 감찰공 위토를 팔아먹더니, 절손(?孫)되고 산소는 묵고있으니, 남의 일이라도 안되었다고 다같이 말하였다.

(7) 1965년 음 11월 30일에 경순, 상천, 종창, 순호 등 4인이 또전기 장소에 가서 문의상심(問議詳審)한 바 전기 사항과 틀림없음을 확인하였다. 이상과 같은 경로로서 수백년 간 실전되었던 감찰공 산소를 찾게 되었으며, 배천 사는 안씨는 감찰공장파 휘 계신(繼信)의 후예(後裔)가 틀림없는데, 근 60년 간 왕래가 없으니 궁금한 마음 금할 수 없다.


3) 감철공파 분파도


영모재기(永慕齋記)

우리 나라의 씨족이 수천 년 동안 유구하게 전하여 왔지만 그중에도 으뜸으로 현저(顯著)한 성씨(姓氏)는 순흥안씨이다. 저 문성공 회헌선생이 진실로 사문(斯文)을 창명함에 있어 울연(蔚然)하게 도학의 조종이 되었고, 팔대손 휘 관은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고 신사사화에 화를 입었으나 곧 신원(伸寃)되었으며, 판서공(判書公)이 휘 호의를 생하니 관이 또 판서요 나라에서 예장을 내렸고, 다시 휘 치화를 생하니 관은 현감이며 역시 임란에 순절하여 충신으로 정려(旌閭)하고 시호(諡號) 소절(昭節)이라 내렸으며, 소절공이 휘 홍복을 생하니 효행으로 주부를 추증(追贈)하였다. 이러한 공들이 이조의 조정에서 계승하여 업적을 남겨 이로써 이미 국가에 빛을 떨쳐 드높이니,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사승(史乘)과 문헌에 실린 미행과 문벌의 창성함이 어찌 저 송대의 호?여(胡?呂)와 동진(東晋)의왕?=사(王?=謝)를 부러워하랴

판서공과 소절공 양위가 운세에 응한 하늘이 낸 뛰어난 재목으로서, 임진년의 문란한 시기를 당하여 몸을 왜적의 토벌에 맡기어 마침내 중흥의 치적을 거두고 전장에서 순절하니, 선조가 시호를 내리고 정려를 명하였으며 당진 북쪽 국사봉 아래 예장하니 사패지이다.

소절공의 묘하에 예부터 재실이 있어 관천일(?薦日)에 제물을 올리기에 용이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선조의 은혜에 보답하고 후손에게 전하게 하려는 도리로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중에 훼손되는 재액(炎厄)을 입어 아직 주선의 예를 갖추지 못하여 송구하더니, 경자년에 이르러 그 제손이 이를 송구하게 여겨 순차로 상의가 돌아 다투어 정성과 힘을 다하여 재목을 모으고 목수를 구해서, 두해에 걸쳐 공사를 마쳐 헌실과 주방이 질연(秩然)하여 넉넉함이 있게 되매 그 전면에 「영모재(永慕齋)」라 써서 게양하고, 후손이 와서 부족한 나에게 기문을 물으니 사양하여 떨치지 못하였다.

대저 소절공의 순의한 훈적의 공로를 흠모하여 그 인사(?祀)를 폐하지 않고 영원무궁토록 제향하여 제손이 더욱 숭모하며 사모하게 하는 것이, 또한 재실의 이름을 ‘영모재(永慕齋)’라 짓는 의를 체득함이며, 성조의 후손된 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상의 업적을 계승하여 펼치는 것은 진실로 선조의 음택이 미친 바이니 운잉(雲仍)으로서 이곳에 올라, 종족을 공경하고 잘 거두는 도의와 조상을 추모하고 석류(錫類)하는 미풍을 다한다면, 선영이 어찌 능히 밝게 제향드림을 흠향하고 돌아보시어 다복함을 내리지 않겠는가

시경에 가로되 “새로 지운 사당이 우뚝하니 효손에게 경사가 있으리라.” 하였으니 진실로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1) 소절공(昭節公) 안공 치화(安公 致和)
우리나라가 도적의 침략을 입은 것이 임진왜란[壬訌]보다 더 참혹함이 없었다. 가리를 타서 흉악한 왜적이 우리 국토를 침략하야 팔도가 거의 산 무너지듯 하고 백성들이 장차 남아나지 못 할 뻔 하다가, 적의 괴수가 낯을 돌리고 험한 풍진이 다시 개인 것이, 어찌 명(明)나라의 두 차례구원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실상은 곧은 신하 굳센 선비들이 갑옷을 띠고 나라를 방어하고 위태함을 무릅쓰고 인군을 보호하였으니, 그 늠름한 의리와 열렬한 충성은 가히 왜놈을 굴복시키고 하늘의 도움을 부른 까닭이다.

당일에 의리에 죽으면서 절개를 세운 사람을 역역히 세어보면 드러내어 칭송할 분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었으나, 증 병조참판(贈兵曹恭判) 시호는 소절(昭節)인 안공 휘 치화, 자는 정숙(字正淑), 호는 성재(號誠齋)가 그 중에 한 분이다.

안씨는 선계가 순흥이라 고려 상호군(上護軍) 자미(子美)께서 비로소 가서(家?를 열어 3세에 와서 휘(諱) 향(珦)은 세상에서 회헌선생(晦軒先生)이라 칭하니, 도덕이 뛰어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문순공 우기(文順公于器), 문숙공 목(文淑公牧), 문혜공 원숭(文惠公元崇), 경질공 원(景質公瑗)이 우뚝하게 서로 이어나서 가문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었다.

조선조에 와서 휘 종례(從禮)는 감찰(監察)이니 공의 5세조(五世祖)이다. 치(緇), 처회(處會)는 다 감찰(監察)이요 관(琯)은 봉사(奉事)니 이분들이 공의 고조증조 및 조부이시고, 고(考)의 휘는 호의(好義)니 이조판서(吏曹判書)요, 남양홍씨길창(南陽洪氏吉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중종 임인(中宗壬寅)에 공을 낳으니, 천성이 무리에 뛰어나 말이 적고 웃음이 드물어 동류들에게 많이 월등하다.

스승에게 나아가 과목을 쫓아 수업할새, 의리 지키는 데는 고기보다 더 즐기고 욕심을 두려워함은 홍수(洪水)나 맹수(猛獸)보다 더 겁내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함이 군진(君陣 주나라 명신)의 풍도가 있었다.

사마시(司馬試: 생원 및 진사, 지금의 고시)에 합격하여 아산 정산 석성(牙山定山石城) 현감을 역임할새, 가는 곳마다 백성을 편안히 하고 관리를 단속함이 각각 적절함을 얻으니 감당(甘棠 위정자를 찬양하는 시)의 칭송이 있었다.

임진년에 왜적이 전쟁할 의사로 뜻밖에 허점을 이용하여 쳐들어오니, 이때 온나라가 안일한 데 젖어 대비하는 일을 오랫동안 전혀 강론치 않았다가 일조(一朝)에 난을 당하니, 선조(宣祖)대왕은 서북으로 피란하고 백성들은 도망갈 겨를이 없는 중 공이 칼날 같은 뜻을 가다듬어 비룡같이 날뛰고 기린같이 떨쳐 고인(古人)의 강회(江淮)를 가로막던 일을 본받고자 하나, 힘은 모자라고 사태는 거창하여 마침내 몸은 떠났으나, 충절은 서있으니 아! 위대하도다. 사실이 주달됨에 그에 정려 세우기를 명령하고 증직 및 시호를 전례대로 하였다.

선영을 따라 당진 국사봉 남쪽 해좌사향에 안장하다. 배위는 증 정부인(贈貞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니 감찰 안세(安世)가 그 부친이다. 아름다운 부덕이 족히 공의 배위가 될 만하다.

묘는 합폄하였고 삼남을 낳았으니 홍복(弘福)은 주부(主簿)요, 홍록(弘祿)은 판관(判官)이요, 홍우(弘祐)는 생원(生員)이다. 손자 사과 충길(忠吉)과 무과급제 효길(孝吉)과 제길은 홍복의 소생이요, 참의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신길(信吉)은 홍록의 소생이요, 대길(大吉)은 홍우의 소생이다.

대개 충절은 백세(百世)의 조종이요, 의리는 만인의 사모함이라. 그러므로 백세(百世)에 분발하고 만인에 뛰어나는 사람이 한두 명 나면 세대의 원근도 관계없이 인품의 고하도 차별 없이 다 우러러보고 사모하기를, 상서로운 기린과 봉이 세상에 나온 것 같이 하는데, 공은 능히 사람마다 사모하는 의리와 세상에서 우러러보는 충성을 세워 기린과 봉의 상서로움 같이 하였으니, 공은 가히 생전에 빛이 나고 사후에도 유감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큰 나라 운수가 비색하여 흉악한 도적이 하늘을 거슬리니, 장하다! 우리 공이 장순의 담과 조고의 간(巡膽?肝)과 같이 충성으로 창을 삼고 의리로 노를 저어 마땅히 힘쓸 데 힘을 쓰고 그 나머지는 거슬려 보지 않았다. 미친 물결이 구렁이에 밀리니 한손으로 막기 어렵다. 기와의 온전함은 실로 부끄럽고 옥으로 부서짐이 오직마땅하다. 이제 칠적(七尺) 몸 버리기를 한 깃털같이 가벼이 여긴다. 실패도 오히려 성공이 될 수 있고 죽는 것도 또한 명예롭다. 그러므로 성주의 표상이 예나 이제나 찬란하게 나타난다. 위대한 절의는 인신(人臣)의 극진함이라. 우뚝한 저 국사봉에 정기가 어려있네. 한 날등 아늑한 곳이 만세(萬世)의 안영지라. 여러 자손이 정성을 쌓아 돌에다 공적을 새기니 천억 년 길이길이 꽃다운 이름 없어지지 않으리.


원주시 문막 사흥동 문중

이곳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비두리 사흥동에 처음 입향하신 선조는 2파 20세 휘 은소(殷素)이시다.

공은 소절공(휘 치화)의 장자 휘 홍복(弘福), 주부공의 둘째아들 효길(孝吉) 선조의 현손으로, 현종 4년(1662) 임인생이며, 숙종 7년(1680)경 사흥으로 입향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공은 배위 원주원씨와의 슬하에 1남 휘 언신(彦信)을 두셨으니, 그 후손들은 계세 면면(綿綿) 번연(蕃衍)하여 세거지를 이루고 수백 년 간 번성하여 왔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의 조류에 따라 각 지방에 분산 거주하고 있으나, 종회를 조직 종사를 관리하여 선조의 음덕과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10월에 세향을 봉행한다. 옛날에는 위토를 타인에게 임대하여 경작하게 하고 그 도조로 종중 재정을 증식하며 세수로 충당하여 왔고, 지금도 그 관행에 따라 종회규약을 변경 위토임차인에게 제수를 준비케 하고, 매년 10월 11일부터 15일까지 선대조 봉사를 행사하고 있으나, 이농현상으로 휴경 위토가 늘어나 차질이 발생하여 어떤 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종중에서는 재정을 증가하고 제각(祭閣)을 건립하는 염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자손들의 성원이 절실히 요망되며, 매년 음 7월 말일 벌초날에는 고향에 모여, 단하루라도 협력하고 서로 돈목하는 자손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통정대부 판관공(휘 홍록) 종중 은진문중

15세 휘 홍록(弘祿) 판관공은 소절공(휘 치화)의 둘째아들로, 명종 을축년(1565)에 출생하시어 인조 병인년(1626)에 졸하시니 향년 62세다. 공은 일찍이 생원시에 급제(及第)하여 금산군수를 거쳐 전주판관을 역임하셨다.

공의 나이 약년일 때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적과 싸우다 순절하신 아버지 소절공(휘 치화)을 당진군 송악면 기지시리 국사봉 아래 예장하고, 아우 홍우(弘祐) 생원공과 맏형 홍복 주부공의 제삼자 제길 조카를 이끌고 벌곡으로 피난 이사하시어 대둔산하 도산리에 삶터를 잡으셨다.

논산시 관촉동은 공의 둘째아들 효자 휘 신길, 이조참판공 이하 후손들의 세거지이다. 400여 년 간 자손이 번연(繁衍)하여 왔고 인근 가야곡 연무 등지에도 흘어져 산다. 지금은 도시로 진출한 자손도 많지만, 고향에 남아 전통의 맥을 지키고 종중사에 노력하는 후손들의 공도 크다할 것이다.

(1) 죽하재 순흥 안공 휘 홍록
공은 순흥인으로 시조 자미는 고려 신호위상호군이며, 삼대를 전하여 회헌선생 향이 있으니 공자와 주자의 작통을 계승하여 울연히 도학의 조종이 되어 문묘에 배향 되었고 시호는 문성이며, 다시 우기를 생하니 호는 죽옥자(竹屋子)며 국학좨주로 순평군을 봉하고 시호는 문순이요, 다시 목을 생하니 호는 겸재며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으로 순흥군을 봉하고 시호는 문숙이며, 다시 원숭을 생하니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으로 순성군을 봉하고 시호는 문혜요, 다시 원을 생하니, 호는 서암이며, 형조전서를 지내고 시호는 경질이며, 다시 종례를 생하니, 사헌부감찰과 양주목사를 지내니 공의 육대조이다.

고조는 처회로 호는 양길이며 예조참판이며, 증조는 관이니 호는 눌재요 관은 판서로 기묘사화와 신사사화에 화를 입었으나 신원되었고, 조는 호의로 관은 이조판서에 이르고 당진에 예장을 하사받았으며, 고는 치화로 호는 성재며 임진왜란에 순절하여 충의로 정여를 명하고 참판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소절이며, 모친은 증정부인 청주한씨이다.

명종 을축에 공이 생하니, 하늘이 낸 특수한 자질로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도학의 진결을 획득하고, 숙성한 문장의 초매함이 당시 속유가 따를 바가 못되었다. 선조 기축에 생원시에 급제하여 통정대부행남대장령을 거쳐 금산군수를 제수받았고, 선정의 치적이 포문되어 다시 전주판관에 전임되었다. 때마침 광해군의 정치시대였으므로 스스로 세상과 서로 어긋남을 자념하고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별장에서 고요히 지내며 주야로 독서하여 일익 진보하였고, 간혹 산수를 유람하며 흉금이 표해하고 일점의 티끌도 없게하며, 마치 세상 물결의 소식에는 귀먹은 것 같이 하여 외롭고 도도하게 지내니 그 자안 자득한 뜻을 어디에 비할 바 있을 것인가

이것이 모두 공의 이력의 대강으로서 진실로 그 후손의 구전하는 내용이다.

인조 병인에 공이 천년으로 졸하니 향년 육십이세요, 배는 숙부인 봉산이씨로 한림 인수의 여다. 2남을 생하니 장은 우길인데 후손이 없고, 차는 신길이니 인조 기사년에 생원하여 이조참의를 지내고 효행으로 정여를 명하고 이조참판을 추증하였으며, 참판이 6남을 생하니, 장은 제민으로 홍문관수찬 시직세마요, 차는 순민? 성민?=언민?선민?=정민이고 증손 및 현손 이하는 번거로워 다 기록하지 못한다.

(2) 안 휘 신길(諱 信吉)
공의 휘는 신길(信吉), 호는 치재(?=齋), 본관은 순흥이다.

시조의 휘는 자미(子美)니 고려 신종조 호군(神宗祖 護軍)이요, 증손의 휘는 향(珦)이요 시호는 문성이요 호는 회헌(晦軒)이니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우기(于器)를 낳았으니 순평군(順平君)을 봉하고 시호는 문순이며, 목(牧)을 낳았으니 호는 겸재(謙齋)요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숙이며, 원숭(元崇)을 낳았으니 순성군(順城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혜며, 원(瑗)을 낳았으니 호는 서암(瑞岩)이요 시호는 경질공(景質公)이니 공의 팔세조(八世祖)이다. 고조의 휘는 관(琯)이요 호는 눌재(訥齋)니 성종(成宗) 정유(丁酉)에 문과로 이판(吏判)이요,

증조의 휘는 호의(好義)니 중종(中宗) 계유(癸酉)에 문과로 이판이며 임진란에 순절하였고, 조(祖)의 휘는 치화(致和)요 호는 성재(誠齋)요 벼슬은 현감이니 용사(龍蛇)의 변을 당하여 순절로 충성을 다했으며 시호는 소절(昭節)이요, 고(考)의 휘는 홍록(弘祿)이요 호는 죽하재(竹下齋)니 선조 기축(己丑)에 금산군수와 전주판관을 지냈으며 비는 봉산이씨 인수(鱗壽)의 따님이다. 공이 무신(戊申)에 나서 인조(仁祖) 기사(己巳)에 성균생원과 이조참의를 행하다가 기유년에 졸하니, 향년이 육십일이라. 논산읍 지산동 화지산 곤좌간향에 안장하고 배위도 동봉하였다. 현종조(顯宗朝)에 효행이 특이하고 도학이 세상에 이름났다하여 정려를 하명하고, 이조참판을 증직 받았으니 사마록(司馬錄)이나 효행록에 기재되어 있다. 배위는 기계(杞溪) 유씨(?氏) 여흠(汝欽)의 따님이니, 6자(六子)와 1녀(一女)를 두었다.

맏이는 제민(濟民)이니 효종(孝宗) 계사(癸巳)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고, 병신(丙申)에 시강원 세마(侍講院洗馬)를 하였고, 아우는 순민(舜民)?성민(聖民)?=언민(彦民)?선민(善民)?=정민(挺民)이며, 장손 태래(泰來)는 아들 4형제를 두었고, 태연(泰然)은 아들 형제를 두었고, 육방손에 태경(泰慶)은 아들 4형제를 두었고, 태문(泰文)은 아들 형제를 두었다. 증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3) 감찰공파 제주 입도(入道) 묘역
본 여러 무덤 동산은 순흥안씨 감찰공파 제주입도 선조 5대의 조상이 예장된 묘역이다.

입도 세거조는 선세 시조의 13세 세종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벼슬을 하신 수도공이시며, 파조이신 고조는 고려말에 사현부 감찰어사 종례공이며, 증조는 이조 승정원좌승지 벼슬을 하신 말생공이시다. 할아버지는 벼슬 주부 오공이며, 아버지는 송공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2남을 두셨다.

공은 생?두 아들중에, 둘째로 서기1468년 무자생이며, 무오 사화의 어려운 때 제주에 입도하시니, 제주 우리 문중에 샘의 원줄기가 되었다 배위 정부인 광산 김씨와 슬하에 1남 보상공을 두시고, 서기 1529년 기축해 향년 62에 외롭고 쓸쓸하게 숨을 거두었다.

공의 손자는 순손공이오, 증손은 성일공이오, 현손은 의인공이며, 4대가 끈끈이 독신으로 가문에 대를 외롭게 이어가 그 발자는 소상하게 전해진 것이 없다. 의인공과 배위 정부인 원주변씨 생에 부모를 영화롭게 할새, 아들 중에 큰아들은 홍국공은 납읍에, 둘째 홍남공은 선흘에, 셋째 홍대공은 가시리에 정착하니, 가문번성의 뿌리를 마련한 터가 되어, 선흘과 가시리에 집성촌은 근 이백년에 이르렀다.

불행한 제주4.3사태는 많은 종친에 인명 피해로 여러곳에 예장된 여러 대의 선묘에 대한 의례가 중단 오랜 세월이 흐르니, 명문선렬의 자손으로 한없이 가슴아픈 일이요. 1980년대 후 해가 바뀌도 오래 만나지 못한 제족이 서로 만나서 회합해다가 돌아다니며 묘제를 하다, 이번에 도두 종친이 이곳 세장지를 기부해 주시고, 조상을 숭배하고 문중을 위한 종친의 지성과 희사금의 협력으로, 입도조를 위시하여 5대 조상의 묘를 이곳 세장원으로 예장하여, 길이 성역으로 높이 받들 것이다.